1996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초고란 벼 · 보리 · 밀 · 조 · 수수 등의 이삭을 털어낸 줄기가 연약하여 목질을 이루지 못하는 초본식물, 즉 풀을 총칭한다. 기물을 만드는 초고재료에는 짚과 왕골, 골 · 부들 등 지상경(地上莖 : 땅 위로 나온 식물의 줄기)이 긴 초본식물류이다.
조선시대에는 초고장이라는 명칭의 장인은 없었다. 풀과 관련된 공장(工匠)으로는 공조(工曹)에 초립장(草笠匠)과 초염장(草染匠)이, 장흥고(長興庫)에 인장(茵匠)이 있었고, 외공장(外工匠)으로는 충청도 · 경상도 · 전라도에 석장(席匠)이 있었다.
농경생활을 영위해 온 우리 나라는 과거에 자원이 부족하고 산업도 발달하지 못하여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짚 · 풀로 생활용품을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그러한 기능은 농촌인들에게는 삶의 기본이었다. 1960년대 이후 산업의 발달과 경제성장, 청장년층의 이농, 새마을운동 등의 영향으로 점차 초고제품을 제작하지 않아 그 기능은 일부 노인층에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제작방법은 도구를 이용하는 방법과 손으로 엮는 방법이 있다. 도구에는 돗틀 · 자리틀 · 가마니틀 · 짚신틀이 있다. 돗틀로 치는 돗자리의 재료로는 왕골 · 골 · 부들 등이 있다. 돗자리는 날실을 돗틀에 일일이 묶어 코를 엮고 바디에 꿰어 두 명이 함께 작업을 해야 하며, 무늬는 별도로 수를 놓아야 하는 등 그 작업 과정에 품이 많이 들어 서민층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돗틀에 걸어 바디로 다져 짜는 은경밀직(隱經密織 : 날줄이 보이지 않고 촘촘히 짜임.)에는 등메와 용문석(龍紋席)이 있다. 자리틀에 걸어 만드는 기물로는 자리 · 망태가 있다.
자리는 노경소직(露經疎織 : 날줄이 보이며 성글게 짜임.)의 형태를 보이며 제작이 쉬워 서민들이 가용(家用)으로 자급자족하는 경향이 많았다. 가마니틀은 돗틀과 형태와 구조는 유사하나 거칠다. 나락을 보관 · 운송하기 위해 20여년 전까지도 제작하였다.
짚신은 서민은 물론이요 청빈한 선비들도 애용한 대중 신발로서 농촌에서는 농한기에 1년 동안 신을 짚신을 마련하였다. 짚신은 발가락에 걸고 삼기도 하지만 대량 제작을 위해 대부분 짚신틀에 걸고 삼았다. 손으로 엮는 방법으로는 왕골 4날을 방석엮음으로 시작하여 두 가닥의 왕골을 씨줄로 삼아 엮는다.
4각 ·8각, 원형의 방석과 삼합 및 송동이와 같은 소품들을 모두 손으로 엮어 만든다. 화문석은 강화, 등메 · 송동이와 소품들은 교동, 용문석은 전라남도 보성의 특산품이었으나 등메의 기능은 수십년 전에 단절되었다.
초고장의 기능보유자 한순자(韓順子)의 전문은 화문석이다. 화문석(일명 발석)은 노경소직의 대표적인 제품으로 꽃문양은 물들인 왕골과 마령풀(백색)을 덧겹쳐 엮어 만든다.
이 때 날은 청얼치와 어저귀를 꼬아서 사용한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초고장 기능보유자로는 1994년 봉화군 물야면의 장세인(張世寅)이 지정되었으나 1997년 7월 31일 타계하여 해지되었다. →완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