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최거린(崔巨鱗). 자는 정보(正甫).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이 되었다. 예종 때에 제안후(齊安侯)와 대원후(大原侯)의 요좌(僚佐)를 거쳐 중서주서(中書注書)·청주통판(淸州通判)을 역임하였다.
이어 우정언(右正言)·좌사간(左司諫)·어사(御史)를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서해도안찰사(西海道按察使)가 되어 이자량(李資諒)이 주창한 원관(院館) 영건(營建)이 이민(吏民)에게 해가 되었으므로 이를 왕에게 알려 중지하게 하였다.
1122년 인종이 즉위하여 이자겸(李資謙)이 정권을 장악하자 이를 극간하여 이자겸의 미움을 받고, 재상 한안인(韓安仁)이 화를 당할 때는 그 인당(姻黨)으로 몰려 고성현(高城縣)에 유배되었다.
1126년 이자겸이 실각하자 호부원외랑 상주목부사(戶部員外郎尙州牧副使)에 제수되었다. 이어 이부낭중 기거주(吏部郎中起居注)에 옮겼으나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