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고성 출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성에서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인접한 면과 사전에 연락하여 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3월 20일 구만면(九萬面)의 국천(鞠川) 모래사장에서 900여 명의 농민과 함께 봉기하여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활약하였다.
3월 21일 「한인관리 퇴직권고문」을 구만면사무소에 첨부하고 다음날 이 권고문을 전국 각 도·군의 관공서에 발송하였다. 일제가 사후 조사한 결과 고성군 3·1운동의 주동자가 최낙종임을 알고 체포하려 하였으므로 피신하였다.
1920년 일본으로 가서 동경에서 재일동포들을 규합하여 동흥노동동맹(東興勞動同盟)을 조직하고 친일단체인 상애회(相愛會)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한편, 서상한(徐相漢)·이혁(李革)·변영우(卞榮宇) 등과 함께 월간잡지 『노동』을 발행하여 일본과 국내에 배포하는 등 항일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을 하였다.
1925년 5월 일본에서 출판법위반으로 벌금형을 받고, 1926년 11월 국가총동원법위반으로 징역 1년 6월과 벌금 30원을 선고받았다.
1980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