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에, 예조판서, 황해도관찰사, 원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그가 성천부사로 있을 때 임금이 불러 “최모는 시종(侍從)에 합처(合處)함이니 어찌 외직에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곧바로 응교에 배수하였고, 대간에서 소신껏 말을 하여 회피하는 것이 없었으며 국가에서도 그의 건의를 많이 채택하였다.
예를 들면 적전(籍田)이 종묘에 제사용으로 되어 있는 것을 민간인이 가만히 경작하여 납세를 하지 않아 지방관리들이 실제는 제사도 궐(闕)하고 문서상으로만 정리한 것을 어사를 파견하여 실제조사를 시켜 사실을 밝혀 정리하도록 한 것 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원주목사로 있을 때 선정을 하여 백성들의 환심을 샀으나 감사와 의견충돌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에 뜻을 버렸다. 그는 병이 깊어지자 아들을 불러놓고 검소한 장례를 당부하였으며 항상 집이 누추하여 친구의 방을 빌려 기거하였다고 한다. 중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모재집(慕齋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대동기문(大東奇聞)』
- 『해동잡록(海東雜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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