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지구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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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6·25전쟁 초기 국군 제6사단이 춘천∼홍천 지역에서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을 저지하여 국군의 조기 붕괴를 막아낸 전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춘천지구전투는 6·25전쟁 초기 국군 제6사단이 춘천∼홍천 지역에서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을 저지하여 국군의 조기 붕괴를 막아낸 전투이다. 국군 제6사단은 춘천의 소양강과 홍천의 말고개 일대에서 지형적인 이점을 최대로 이용하여 6일 동안 방어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춘천~홍천 축선 진출을 지연시켰다. 북한군은 제2군단 예하 병력을 춘천∼홍천∼이천∼수원 축선으로 우회 기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국군의 병력 증원과 퇴로를 차단하려는 북한군의 작전계획은 큰 차질을 빚었고 국군은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다.

목차
정의
6·25전쟁 초기 국군 제6사단이 춘천∼홍천 지역에서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을 저지하여 국군의 조기 붕괴를 막아낸 전투.
경과

1950년 6월 25일 국군 제6사단은 가평에서 현리까지 84㎞의 넓은 정면을 방어하고 있었다. 제6사단은 사단사령부를 두고, 예하의 제7연대를 춘천 방면에, 제2연대를 홍천 방면에 배치하는 한편 제19연대를 예비연대로 원주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반면에 북한군은 춘천과 홍천에 제2군단을 공격 부대로 투입하였다. 북한군 제2군단은 부대 규모면에서 서울 방면을 공격하는 제1군단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임무의 중요성은 매우 높았다. 제2군단이 예정된 시간 내에 춘천, 홍천을 점령한 후 이천, 수원, 그리고 원주를 장악해야만 국군 주력에 대한 완전한 포위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북한군 제2군단은 제2사단을 화천∼춘천 축선에, 제12사단을 인제∼홍천 축선에 각각 투입하여 공격 개시 첫날에 가평∼홍천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2일차에 북한군 제2사단은 덕소에서 한강을 건너 한강 이남에서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제603모터싸이클연대가 홍천에서 제12사단을 초월하여 수원을 점령함으로써 국군의 퇴로와 증원을 차단한다는 계획하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북한군은 6월 25일 05시 국군 제6사단 전방 경계진지에 대해 30분간의 공격준비사격을 한 연후에 자주포를 앞세우고 보병부대의 공격을 개시하였다.

춘천지역에서는 경계진지를 돌파한 북한군 제2사단 제6연대가 자주포 10대를 앞세우고 국군 제7연대 제1대대가 배치된 옥산포로 공격해 왔다. 이 때 대전차포중대의 심일 소위가 육탄공격으로 자주포 2대를 파괴하여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장병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이날 낮 동안 북한군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논 밭 지대에서 완전 노출된 채로 정면공격을 반복했다. 이에 맞서 제6사단 포병대대가 그들을 향해 정확한 포격을 가함에 따라 많은 피해를 입은 북한군은 소양강을 도하하지 못했다. 오히려 국군 제7연대 제1대대가 25일 19시에 반격을 가해 적을 북한강까지 추격하였으며, 26일 오전에는 포병의 지원포격과 원주에서 우두산 진지로 이동한 제19연대 제2대대의 측방엄호사격을 받으면서 옥산포로 집결 중이던 북한군 1개 대대를 기습 공격해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공격이 지연되자 북한군 제2군단장은 홍천 방향으로 공격하던 제12사단의 일부를 춘천방향으로 전환시켰다. 그럼에도 북한군은 소양강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26일 13시경 북한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강력한 공격준비사격하에 재공격을 감행하자, 사단장은 천연장애물인 소양강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전방의 부대를 15시에 철수시켰다.

북한군은 6월 27일 05시에 강력한 포병사격하에 일부가 소양강을 도섭하고 일부가 소양교로 공격해 왔다. 국군은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였다. 그러나 11시 30분경 봉의산 정상의 관측소가 북한군 보병들에 의해 점령당하자 제7연대 병력들은 모두 춘천시내로 후퇴하였다.

한편 소양강을 두고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27일 11시경, 한동안 두절되었던 사단과 육군본부를 연결하는 전화가 소통되었다. 육군본부 참모부장은 “서부전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육군본부는 시흥으로 철수함으로 제6사단은 사단장의 판단에 따라 철수하면서 중앙선을 중심으로 중부전선에서 지연전을 전개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비로소 인접부대의 전투상황을 알게 된 사단장은 홍천 북방에서 제2연대가 위기에 빠져있고, 제7연대도 진지가 돌파된 점을 고려해 홍천 방어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사단장은 제7연대장에게 춘천에서 철수해 춘천∼홍천 사이의 원창고개를 차단해 주변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제7연대는 제2대대를 원창고개에 배치하고 주력을 홍천으로 철수시켰다. 제2대대는 원창공개에서 29일 정오 무렵까지 수차례의 북한군 공격을 저지한 후 홍천으로 철수하였다.

춘천에서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을 때 홍천 북방에서도 국군 제2연대가 27일 아침부터 북한군 제12사단으로부터 강력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제6사단장은 인제∼홍천 축선의 제2연대가 위기에 처하자 춘천으로 증원되었던 제19연대를 홍천으로 전환하여 말고개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도록 했다.

먼저 제19연대 제3대대가 제2연대를 증원하기 위해 말고개로 투입되었다. 제2연대와 제19연대 제3대대는 대전차 특공대를 조직해 10여 대의 자주포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날 주간 전투의 충격으로 북한군은 몇 시간 동안 피해를 수습한 후 일부 부대가 국군 제2연대를 공격했으나 제2연대의 역습으로 격퇴되었다.

북한군 제12사단 주력은 29일 아침부터 전면적인 공격에 나섰으나 이마저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 때 제2연대는 북한군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반격을 가하다가 후퇴하는 방법으로 적의 진출을 지연시켰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6월 30일 18시에야 홍천을 점령할 수 있었다.

결과

이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은 방어에 유리한 춘천의 소양강과 홍천의 말고개 일대에서 지형적인 이점을 최대로 이용하여 6일 동안 방어전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북한군 제2군단은 춘천과 홍천 축선으로의 진출이 지연되었다.

결과적으로 북한군 제2군단은 예하의 병력을 춘천∼홍천∼이천∼수원 축선으로 우회 기동시켜 국군의 병력 증원과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그들의 제1단계 작전에 기여한다는 당초의 작전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으며, 반면에 국군은 한강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다.

참고문헌

『6·25전쟁 60대전투』(온창일 외, 2010)
『알아봅시다 6·25전쟁』(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6·25전쟁사: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2(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집필자
박동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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