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달제(吳達濟)와 조광조(趙光祖)의 기념비각으로 1800년(정조 24)에 비를 세웠다.
조광조는 이충동(二忠洞)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뒤 성리학자로서 도덕적 이상정치를 꾀하다 기묘사화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선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달제는 이충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1634년(인조 12)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으로부터 부교리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척화파인 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과 함께 끝까지 투쟁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굴욕적인 강화가 성립되었다. 이로 인하여 청국의 심양으로 끌려갔으나 지조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충절을 지켜 1637년에 처형되었다. 조정에서는 삼학사(三學士)라 칭하고 영의정에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라 하였다.
조광조와 오달재 두 사람이 이충동에서 태어나 자랐으므로 이에 이들의 충절을 기려 제각을 지었다.
경기도 평택시의 ‘이충동’이라는 지명은 ‘두 명의 충신이 살았던 동네’라는 뜻으로, 두 충신이란 중종 때의 문신 조광조와 인조 때 3학사의 한 사람인 오달제를 지칭하며 이 두 사람의 유허비를 보호하는 비각이 충의각이다.
진위유림이 나라에 허가를 받은 후, 1800년에 비(碑)를 세웠다.
비신(碑身)은 길이 123㎝·폭 55㎝·두께 16㎝로 전면 위쪽에 ‘송장(松莊)’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장식되어 있다. 송장은 옛 지명인 진위현 송장면을 가리킨다. 전면 중앙에는 ‘정암조선생 충렬오학사 유허지비(靜菴趙先生 忠烈吳學士 遺墟之碑)’와 ‘숭정기원후 3경신(崇禎記元後 三庚申) 6월(六月)에 세웠다(立)’는 내용, 아래쪽에는 유허비를 세운 뜻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