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시대 치과의학은 질병에 관한 개념이 정령병인설(精靈病因說)에 의해 지배되던 시기였으므로, 주로 무술적 방법(巫術的方法)을 취했고, 삼국시대 치과의학은 고조선시대부터 전해진 지식과 중국과의 문화 교류가 점차로 활발해짐에 따라 전해진 중국의 치과의학, 그리고 다시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불전을 통해서 소개된 인도의 치과의학과 그들의 의설, 그리고 도교의 전래와 함께 도교의 치과의학이 서로 융합되면서 중기 이후부터는 많은 발달을 보았다.
1877년(고종 14)에는 부산에 일본 해군이 서양 의술에 의한 제생의원을 개설하여 우리 나라가 서양 치과의학을 새로 도입하는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한국의 치과의학 분야에도 새로운 서양 의술을 도입하게 되었고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과 일본인 치과의사들의 개인 치과의원에서 임상시술이 이루어졌다.
1907년 최초로 ‘잇방’이 서울 종로에 개설되어 치과전문이라는 간판으로 서양 치과의술이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최초로 정규 치과의학교육을 받은 사람은 함석태(咸錫泰)로, 1912년 일본에서 일본 치과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서울에서 한성치과의원을 개설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치과의학 교육기관으로는, 1916년에 제정된 <조선전문학교령>에 따라 1922년 4월 2년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의 전신)가 창설되었고 1929년 4월에 4년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어 광복될 때까지 교육해왔다.
광복 직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가 경성치과대학으로 발족하여, 1945년 11월부터 우리 나라 사람만으로 운영되는 치과교육이 시작되었고, 이듬해인 1946년 8월 미군정 법령 제102호 <국립서울대학교설치령>에 따라 국립 서울대학교의 한 단과대학으로 편입되었으며, 당시 부속병원의 임상 진료과목은 구강외과 · 치과보존과 · 치과보철과 등 3개 과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식의 치과교육방법이 미국식의 치과교육체제로 조금씩 기초가 잡혀 가려던 무렵, 1950년의 6·25전쟁으로 인하여 수업이 일시 중단되었고, 부산 임시수도에서 전시 연합대학을 설치하여 합동수업을 하다가 1953년 정부의 환도 결정에 따라 3년 만에 다시 본 교사에서 강의와 임상실습을 하였다.
1950년대에는 KCAC와 ICA의 원조로 일제 때부터 사용해 오던 유닛 체어(unit chair)를 교체하였고, 1959년에는 대통령령 제1430호로 <국립학교설치령>이 개정되어 같은 해에 치의예과가 개설됨으로써 교육연한이 4년제에서 6년제로 연장되었다.
1960년을 전후하여 구미 각국과 일본 등지에서 유학하고 귀국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정부의 과학기술 진흥정책 강화와 연구시설의 확충에 따라 1960년대 후반부터 연구의 수적 · 질적 향상이 이루어졌다.
1967년까지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이 국내의 유일한 치과교육기관이었으나 생활 향상과 인구증가에 따라 의료인력이 더 필요하자 1967년에 경희대학교에, 1968년에 연세대학교에 치과대학이 각각 신설되었다.
1970년대에는 조선대학교(1974) · 경북대학교(1977) · 부산대학교(1979) · 전남대학교(1979) · 전북대학교(1979) · 원광대학교 (1979)에 치과대학이 신설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로도 단국대학교(1980)와 강릉원주대학교(1992)에 신설되어 현재 우리 나라에는 11개 치과대학이 있다.
1970년대에는 영국 차관, 1980년대에는 EXIM 차관, OECF 차관으로 다수의 기기가 도입되어 교육 · 연구 및 환자진료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1955년까지는 부속병원의 임상진료과가 치과보존과 · 치과보철과 · 구강외과 등 3개 과에 불과했으나 학문의 발전과 세분화에 따라 1956년에 소아치과, 1957년에 치주과, 1958년에 치과방사선과, 1960년에 구강진단과, 1964년에 치과교정과가 각각 신설되었다.
치과대학에는 구강해부학교실 · 구강병리학교실 · 구상생리학교실 · 구강생화학교실 · 치과재료학교실 · 예방치과학교실 · 구강미생물학교실 및 치과약리학교실 등의 기초학교실이 있다.
1989년 현재 전국 10개 치과대학에서 매년 학사 730명이 배출되고 있고, 교직원 수는 227명(임상교수 176명, 기초교수 51명)이며 치과의사 수는 8,583명이다.
우리 나라에서의 치의학 분야 학술활동은, 초기에는 일본인이 조직한 조선치과의학회(1919)와 경성치과의학회(1932)에 참여했고, 광복 직후에는 대한치과의학회(조선치과의학회 전신)로 명칭을 바꾸어 학술활동을 했다.
6·25전쟁으로 한때 침체상태에 있다가 1953년 서울 환도 후 대한치과의사협회 산하 분과학회가 하나둘 창립되면서 왕성한 학술활동이 시작되었다.
현재 19개의 분과학회, 즉 대한군진치과학회(1955) · 대한치과교정학회(1959) · 대한치과보존학회(1959) · 대한구강외과학회(1959) · 대한악안면방사선학회(1959) · 대한소아치과학회(1959) · 대한치과보철학회(1959) · 대한치주과학회(1960) · 대한치과의사학회(1960) · 대한구강해부학회(1962) · 대한구강보건학회(1962) · 대한악안면성형재건외과학회(1962) · 대한치과의료관리학회(1963) · 대한구강병리학회(1963) · 대한치과기재학회(1966) · 대한구강내과학회(1975) · 대한구강생물학회(1975) · 대한치과이식학회(1976) 및 대한치과교합학회(1981) 등이 있다.
일제강점 이후, 최초로 한국 치과의학계가 발행한 잡지는 ≪조선치과의학회지≫(1925)이고 1930년에 ≪조선지치계 朝鮮之齒界≫, 1932년에 ≪경성치과의학회지≫와 ≪만선지치계 滿鮮之齒界≫가 창간되었다.
그리고 8·15광복 직후에는 ≪조선치계≫, ≪조선치과의보≫가 창간되어 치과의학 분야의 논문들이 여러 편 발표되었고, 1954년에는 ≪대한치과의사협회지≫가 창간되었다.
또한 1960년대에는 ≪대한치과기재학회지≫(1966), ≪대한구강보건학회지≫(1967) · ≪대한치과보철학회지≫(1968), 1970년대에는 ≪대한치과교정학회지≫(1970) · ≪대한치주학회지≫(1971) · ≪대한악안면방사선학회지≫(1971) · ≪대한구강내과학회지≫(1973) · ≪대한소아치과학회지≫(1974) · ≪대한치과보존학회지≫(1975) · ≪대한구강외과학회지≫(1975) · ≪대한구강해부학회지≫(1977) · ≪대한구강생물학회지≫(1977) · ≪대한구강병리학회지≫(1977) 등이 창간되었다.
이어 1980년대에는 ≪대한치과교합학회지≫(1980) · ≪대한구강 · 악안면외과학회지≫(1984) · ≪대한두개하악장애학회지≫(1989)가 각각 창간되었다. 현재 모든 학술단체들이 학회지를 매년 1, 2회 발간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이른바 법정연구소인 치의학연구소는 아직 없고 모두 치과대학의 부설 연구소로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치학연구소(1980),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에 구강과학연구소(1988), 조선대학교 치과대학에 구강생물학연구소(1978), 전북대학교 치과대학에 치의학연구소(1984)가 있다.
이 연구소들은 한국학술진흥재단, 한국과학재단, 대우학술기금, 대학발전기금 등의 지원을 받고 연구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그 지원에 힘입어 1980년대 이후부터는 다수의 연구논문이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되었으며 국제 학술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동안 많은 치의학자들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분야가 많으며, 구강 및 악안면 부문에 대한 치료도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건강에 대한 욕구와 행복의 추구가 보편화되고,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치과의료 수요의 형태가 바뀌고 있으며 질환의 양상도 크게 변화되고 있다. 또한 인접과학의 발달과 여러 첨단산업의 영향으로 의료기기 · 치과재료가 날로 개발되고 기초 소재가 개발되면서 진단방법이 바뀌고, 보철치료 · 수술 등 치료방법도 눈부시게 발전되고 있다.
모든 분야에 응용되는 컴퓨터의 도입으로 복잡한 분석이 단시간에 가능해져서 질환의 예방 · 치료에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 유전공학 등의 발달은 완전한 보철물제작을 가능하게 할 것이며, 불소를 이용한 치아우식증의 예방 확대로 질환양태는 전혀 달라지고, 치과교정학 · 심미치과학 · 임프란트치과학 · 노인치과학 분야의 확대와 함께 교통사고의 급증으로 인한 악안면구강외과학 · 악안면미세수술학 · 악안면보철학 등도 발전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