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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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비 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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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
개념
옻칠을 기물이나 용기에 한 칠공예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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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옻칠을 기물이나 용기에 한 칠공예품.
내용

한반도에서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을 근거로, 옻칠을 기물에 사용한 것은 기원전 1세기 전후부터라고 추정하고 있다. 1988년 경상남도 창원시 다호리(茶戶里) 고분에서 기원전 1세기경의 청동기 및 칠기 유물이 대량 발굴되었다.

농기구·문구류·무기류·동경·동전 등 생활용품 26종 69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와 원삼국시대(삼한시대)의 문화를 알려주는 극히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 중 모든 칠기류는 흑칠이고 목심칠기(木心漆器)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대나무를 바탕으로 한 남태칠기(藍胎漆器)와 점토를 바탕으로 한 도태칠기(陶胎漆器)가 있어 우리 민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옻칠을 다양하게 활용하였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특히 목심(木心)은 손으로 깎은 것, 물레(갈이틀 : 일명 로구로)를 돌려서 깎은 것, 판재를 짜맞춘 것 등 나무를 다루는 솜씨도 매우 능란했다.

이들 기형(器形)은 중국 한대(漢代) 칠기류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어서, 그동안 평양의 대동강유역이나 낙랑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근거로 우리가 중국 한대의 영향을 받아 칠기를 제작하였다는 주장을 일축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중국 한대의 칠기류에는 이배(耳杯) 종류가 보이지 않으며, 주칠(朱漆)을 바른 흔적이 없다. 반면, 오히려 무문토기 가운데 중남부지역의 흑색 토기류의 그릇 모양과 유사성을 보이며 남부지역의 칠기 문화가 매우 독창성을 띠고 있어서 한국식 동검(銅劍) 문화의 전통 아래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청동검의 칼자루와 칼집에 옻칠을 한 것은 고고학적 자료로 크게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그 밖에도 무구(武具)로 간주되는 칠봉(漆棒), 옻칠한 쇠도끼 자루, 낫자루, 따비 자루 부분까지 옻칠을 한 흔적이 남아 있어, 옻칠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해 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또, 기원전 3세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충청남도 아산 남성리(南城里) 석관묘에서 동검(銅劍)·다뉴조문경(多紐粗紋鏡)·방패형 청동기와 더불어 옻칠을 했던 박편들이 발견되었고, 평양 정백리(貞栢里) 고분에서는 동과(銅戈)에 흑칠을 한 칼집이, 석암리(石岩里) 왕근묘(王根墓)에서도 흑칠 칼자루가 발견된 바 있다.

서기전 108년에 설치된 낙랑 때 제작된 칠기 물건으로는 서기전 85년이라 적힌 칠이배(漆耳杯)가 있으며, 서기 102년의 칠안(漆案)이 있다. 남성리 고분에서 발굴된 관은 내부에는 주칠을, 외부에는 흑칠을 하여 호화스러움은 나타내고 있다. 또 낙랑 후기의 칠기는 황색·녹색·갈색과 일부 청색계의 칠화(漆畵)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칠화는 낙랑칠기의 특징인데, 이는 온도가 높아도 적당한 습도가 없으면 건조되지 않는 옻의 특성을 살려 옻칠로써 가늘게 선으로 문양을 그려 건조를 쉽게 하는 채화 기법이 많이 응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낙랑칠기 가운데 기술적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칠이배 등의 그릇들로, 이는 대개 협저(夾紵), 즉 삼베를 몇 겹 칠로 발라 성형한 위에 옻으로 마무리하는 건칠의 조형 기술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7세기 고구려시대 강서(江西) 고분과 집안(輯安) 고분에서 발견된 건칠 관(棺)이 있으나 아직까지 발굴된 유물로 보아서는 이렇다 할 고구려 시대의 칠기 유물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1971년 공주에서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에서, 판재에다 옻칠을 한 칠관을 비롯, 두침(頭枕)·족좌(足坐)·패식(佩飾)·장도(粧刀)·칼집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다른 고분 부장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귀 품목들이었다.

또 경주 조양동(朝陽洞) 고분군에서는 칠관의 흔적과 옻칠한 청동 칼자루가 발견되었고, 대구·성주·함안 등지에서 발굴된 신라시대 옻칠 유물로 보아 5세기 경부터 옻칠을 기물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밖에 황오리(皇吾里) 제14호 고분에서는 목관이 놓였던 자리에서 점토상(粘土床) 위에 금박을 올린 목판편(木板片)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일종의 칠도금이며 그 중 금동칠각병(金銅漆角甁)에 옻칠을 입힌 것은 칠기라기보다 금속에다 도장을 한 금태칠기로 보인다.

극히 드문 예로서 황남대총 유물 중 피죽(皮竹)으로 짠 남태칠기라든지 식리총 유물 중 삼베를 겹겹이 발라 만든 건칠기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 밖에 옻칠이 아닌 특수 안료로써 문양을 그린 밀타회(密陀繪)는 주목되는 문양장식 기법의 하나이다.

1975∼1976년 사이에 경주 부근에서 출토된 칠기 유물 중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은 무려 100여 점인데, 그 칠기들은 주로 찬합·잔(盞)·발(鉢) 등으로서 궁중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중앙 관서에 칠전(漆典)이 따로 있어, 옻나무를 체계적으로 심고 관리하여 칠을 채취하고 칠기를 늘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칠기의 명칭은 옻칠을 도장한 바탕으로 무엇을 사용하였느냐에 따라 정해지는데, 나무에 옻칠을 한 목칠기(木漆器), 대나무를 활용해 기물을 만든 뒤 옻칠을 한 남태(藍胎), 삼베와 옻칠을 하여 뼈대를 만든 뒤 그 위에 옻칠을 도장해서 완성 한 건칠(乾漆), 종이를 꼬아 기물을 만든 뒤 그 위에 옻칠을 도장해서 완성 한 지승칠기(紙繩漆器), 종이를 활용해서 기물을 만든 뒤 그 위에 옻칠을 도장해서 완성 한 지칠기(紙漆器), 옹기·토기·도자기 등에 옻칠을 해서 완성시킨 와태칠기(瓦胎漆器), 일명 도태칠기(陶胎漆器)가 있다.

이 밖에도 금속 위에 옻칠을 도장해서 기물을 완성시킨 금태칠기(金胎漆器), 가죽을 활용해 기물을 만들어 옻칠 한 칠피(漆皮)공예, 옻칠기 위에 옻칠이나 기타 도료로 문양을 그린 채화칠기(彩畵漆器), 칠기 위에 자개를 가공해서 붙이고 옻칠을 한 나전칠기(螺鈿漆器) 등이 있다.

옻칠을 활용해서 완성되는 물건으로는 주로 차스푼·컵·컵받침·쟁반 등 차도구 종류와 보석함, 상자·벼루집·서류함 등 문방구용품, 구절판·오절판·밥그릇·국그릇·교자상·대궐반·소반 등 식생활용품 등도 매우 다양하다.

참고문헌

『칠공예』(권상오, 1996)
『한국칠기이천년』(국립민속박물관,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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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정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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