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592년(선조 25) 8월 1일조헌(趙憲)의 의병과 영규(靈圭)의 승병이 합군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이어 8월 18일 남은 700인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진격,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막강한 왜군과 혈전을 벌여 전원이 순절하였다.
4일 후인 22일 조헌의 제자 박정량(朴廷亮)ㆍ전승업(全承業) 등이 시체를 거두어 하나의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이라 하였다.
1603년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峯趙憲先生一軍殉義碑)'가 세워지고, 1634년(인조 12) 순의단(殉義壇)이 설치되어 제향을 올렸다. 그 뒤 1647년 종용사(從容祠)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1663년(현종 4)에 ‘종용사’라는 사액(賜額)과 4결(結)의 토지를 내려 춘추제향에 쓰게 하였다.
순의단이 설치되면서부터 각 지방수령과 유생의 성금과 의연금이 답지하여 옆에 강당인 종용당(從容堂)도 건립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는 일본인들이 진화사(進化社)를 만들어 사우(祠宇)와 의총을 허물고 일군순의비를 폭파한 뒤 제토(祭土)를 강제로 팔아버렸다.
광복 후 1952년에 군민이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재건하였다. 1970년 국가에서는 경역을 2만2800평으로 확장하고 종용사ㆍ기념관ㆍ순의탑 등을 새롭게 지어 사적으로 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