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악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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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전서 / 탐진농가
여유당전서 / 탐진농가
한문학
작품
조선 후기에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악부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탐진악부」는 조선 후기에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악부시이다. 1801년(순조 1)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작품이다. 「탐진악부」는 「탐진촌요」, 「탐진농가」, 「탐진어가」를 합하여 일컫는다. 형식은 모두 칠언절구로 되어 있다. 내용은 농어촌 민중들의 소박하고 진솔한 삶을 생동감 있게 그리고 탐관혹리의 횡포로 고통을 겪는 농어촌 민중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정약용은 당시의 부패한 정치 현실을 고발하여 조선시 정신을 구현한 것이라 하겠다. 최근에는 「탐진악부」가 영사악부일 것이라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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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악부시.
내용

조선 후기에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악부시.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권4에 수록되어 있다.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작품으로, 탐진은 강진의 옛 이름이다.

지금까지 「탐진악부」는 「탐진촌요」 15수(문집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시제(詩題)에는 20수로 되어 있으나 실제 15수만 수록되어 있음), 「탐진농가」 10수(원래 12수였으나 10수만 남아 수록됨), 「탐진어가」 10장을 합하여 일컬어 왔다.

지은 시기는 저자 자신이 1804년에 「탐진농가」를 지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다른 작품도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형식은 모두 칠언절구로 되어 있어 외견상 정형성을 지향한 근체시로 간과할 수 있으나, 실제는 절구체로서의 가영성(歌詠性)을 추구한 것이다.

내용은 두 가지 성향으로 크게 구별된다.

① 농어촌 민중들의 소박하고 진솔한 생활상과 삶의 터전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 것으로 많은 작품이 이에 속한다. “모 품파는 집집마다 아낙네들 정신없어/보리 베는 남편일랑 거들지도 않는다네/이씨네 약속 저바리고 장씨네를 따라가니/돈 모를 밥 모보다 좋아하기 때문이네[秧雇家家婦女狂 不曾刈麥助盤床 輕違李約趨張召 自是錢秧勝飯秧].”

위의 한시에서 밑줄친 단어들은 정약용이 시어로 쓰기 위하여 그 지방의 토속어를 한자어로 만든 것이다. 곧 ‘반상(盤床)’은 남편을 일컫는 말이고, ‘전앙(錢秧)’은 품삯을 온통 돈으로 지급받는 경우이며, ‘반앙(飯秧)’은 밥을 제공하는 대신 품삯을 조금 감하는 경우를 말한다.

위의 시는 모내기철 농촌의 바쁜 정경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보리 베는 고된 일을 하는 남편은 거들떠보지 않고 돈을 받는 모 품팔이에 정신없으며, 그것도 유리한 곳을 좇아 먼저한 약속도 가볍게 팽개쳐 버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언뜻 보면 약삭빠른 듯도 하지만 실제로는 가식이 없는 순박한 민중들의 참모습을 대할 수 있는 것이다.

② 전자에 비하여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 붕괴해 가는 봉건체제에서 비롯되는 실정(失政)과 탐관혹리(貪官酷吏)의 횡포로 고통을 겪는 농어촌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을 그리고 있다.

“무명베 바래어 흰눈처럼 고왔는데/나졸들 달려와 이방전으로 바꿔 가고/누락시킨 토지세 독촉이 성화 같네/삼월달 중순에는 세선이 떠난다고[棉布新治雪樣鮮 黃頭來換吏房錢 漏田督稅如星火 三月中旬道發船].”

촌민들이 애써 무명베를 바래어 희고 곱게 만들어 놓자마자 나졸들이 이방의 돈(아마도 고을의 아전으로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이방의 돈인 듯함)을 가지고 달려와 바꾸어 가버린다. 물론 정당한 값을 쳐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협잡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재해 입은 전토(田土)라고 거짓 보고하여, 관청의 장부에는 세금을 면제시켜 놓고는 이를 착복하기 위하여 독촉이 성화 같다.

이 시는 곧 당시의 부패한 정치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 작품은 형식과 내용면에서, 정약용이 주창한 조선시(朝鮮詩) 정신이 실천적으로 구현된 것이라 하겠다.

한편, 「탐진악부」는 위에서 거론한 「탐진농가」류의 작품군이 아니며, 별개의 악부시, 곧 영사악부(詠史樂府)일 것이라는 견해도 최근에 제기되고 있다.

이는 동일한 사건으로 동시에 유배당하여 김해에 있었던 이학규(李學逵)와 정약용 간의 교류에 의해 이루어진 시문들을 검토하면서 제기된 것으로, 이학규는 정약용의 「탐진악부」를 염두에 두고 「영남악부」를 지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영남악부」가 영남지방과 관계 있는 역사상의 인물 · 풍속 · 지리 등을 소재로 하여, ‘소서(小序)+본시(本詩)’의 형태와 잡언체(雜言體)의 형식을 취한 연작 악부시임을 고려한다면, 「탐진농가」류와는 형식과 내용면에서 전혀 같지 않다.

「탐진농가」에 대응해서 이학규가 「강창농가」를 별도로 지었는데, 실제로 정약용의 「탐진촌요」와 「탐진어가」에 대응하여 이학규는 「상동초가(上東樵歌)」와 「남호어가(南湖漁歌)」를 지었는 바, 이들은 모두 칠언절구로 되어 있으며 내용도 서로 유사하다.

정약용도 우리나라의 역사와 풍속 지리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이익(李瀷)계의 학자로서 이익( 『해동악부(海東樂府)』)과 안정복(安鼎福)(「觀東史有感 効樂府體 五章」)에 이어 영사악부를 창작하였을 개연성이 있는바, 앞서의 검토와 연관지어 볼 때 「탐진악부」가 그에 해당될 것으로 보인다.

곧, 탐진 지방의 역사 · 인물 · 풍속을 소재로 하면서 역사 현상에 대한 정약용 특유의 날카로운 풍자와 의론(議論)이 담긴 영사악부로서의 「탐진악부」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며, 또한 이러할 때 서울의 권귀층(權貴層)에서 「탐진악부」를 접하고, 정약용을 비방하였다는 내용이 더 분명히 이해되리라고 본다.

참고문헌

『여유당전서』
『한국한문학사』(이가원, 민중서관, 1976)
『다산정약용문학연구』(김상홍, 단국대학교 출판부, 1985)
「낙하생(이학규)과 다산(정약용)의 동인적 결속과 실학문학의 전개」(백원철, 『공주사범대학교논문집』 제26집,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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