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저강(일명 동가강) 일대에 걸쳐 사는 야인(여진인)들은 원말명초(元末明初)의 혼란기를 이용해 조선의 강계·여연 등지를 자주 침입해 인구·우마·재산 등을 살상하고 약탈하였다.
이에 세종은 정벌군의 총사령관에 평안도절제사 최윤덕(崔閏德)을 임명하고 평안도의 마보정군(馬步正軍) 1만명과 황해도 군마 5,000필을 징발해 총 2만명의 군대를 1433년 4월 10일 강계부에서 7대로 분군(分軍)해 정벌을 단행하였다.
정벌군의 조직과 그 전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군절제사 이순몽(李順蒙)은 2,515명을 거느리고 수적(首賊) 이만주(李滿住)의 채리(寨里 : 목책으로 방위시설을 갖춘 지역)로 향해 남녀 56명을 생포하였다.
좌군절제사 최해산(崔海山)은 2,070명을 거느리고 차여(車餘) 등처로 향해 남자 1명을 생포하고 3명을 참수하였다.
우군절제사 이각(李恪)은 1,770명을 거느리고 마천(馬遷) 등처로 향하여 남녀 14명을 생포하고 43명을 참수하였다.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이징석(李澄石)은 3,010명을 거느리고 올랄(兀刺) 등처로 향해 68명을 생포하였고, 동 김효성(金孝誠)은 1,888명을 거느리고 임합랄(林哈刺) 부모의 채리로 향해 남녀 16명을 생포하고 13명을 참수하였다.
상호군(上護軍) 홍사석(洪師錫)은 1,110명을 거느리고 팔리수(八里水) 등처로 향해 남녀 31명을 생포하고 21명을 참수하였다.
그리고 정벌군 총사령관 최윤덕은 2,599명을 거느리고 임합랄의 채리를 공격해 남녀 62명을 생포하고 98명을 참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정벌에서 생포된 여진인은 모두 248명, 참수된 자는 모두 178명에 달하였으며 그밖에 우마 177필을 노획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태종 이래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하였던 압록강 유역을 개척하고 여연·자성·무창·우예 등 4군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