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형(公兄). 서울 출신. 한광적(韓光迪)의 증손이며, 한치응(韓致應)의 손자로, 한진정(韓鎭庭)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해에 홍문관관원으로 발탁되었다.
1867년(고종 4) 성균관대사성, 1868년 이조참의, 1871년 대거승지(對擧承旨)를 역임하였다. 1872년 송도유수(松都留守)로 부임할 때 성역(城役)을 잘 수행하였다 하여 어사(御史)에 의하여 포장(褒奬)됨으로써 가자(加資 : 품계를 올려 줌)되었다. 또한, 유수로서의 치적이 뛰어나 임기가 다 되었으나 송도민이 간청하여 유임되기도 하였다.
1873년 정사 이근필(李根弼), 서장관(書狀官) 조우희(趙宇熙)와 함께 부사의 직책으로서 중국에 별사(別使)로 파견되었다. 또한, 1876년에 공조판서에 올랐는데 진하 겸 사은사(陳賀兼謝恩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후 형조판서를 거쳐 1880년 다시 공조판서로 부임하여 부묘도감제조(祔廟都監提調)를 겸직, 공역(工役)을 인정받아 가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