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돈원 ()

근대사
인물
개항기 때, 공조판서, 형조판서, 부묘도감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공형(公兄)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20년(순조 20)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청주
출생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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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개항기 때, 공조판서, 형조판서, 부묘도감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형(公兄). 서울 출신. 한광적(韓光迪)의 증손이며, 한치응(韓致應)의 손자로, 한진정(韓鎭庭)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58년(철종 9)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해에 홍문관관원으로 발탁되었다.

1867년(고종 4) 성균관대사성, 1868년 이조참의, 1871년 대거승지(對擧承旨)를 역임하였다. 1872년 송도유수(松都留守)로 부임할 때 성역(城役)을 잘 수행하였다 하여 어사(御史)에 의하여 포장(褒奬)됨으로써 가자(加資 : 품계를 올려 줌)되었다. 또한, 유수로서의 치적이 뛰어나 임기가 다 되었으나 송도민이 간청하여 유임되기도 하였다.

1873년 정사 이근필(李根弼), 서장관(書狀官) 조우희(趙宇熙)와 함께 부사의 직책으로서 중국에 별사(別使)로 파견되었다. 또한, 1876년에 공조판서에 올랐는데 진하 겸 사은사(陳賀兼謝恩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후 형조판서를 거쳐 1880년 다시 공조판서로 부임하여 부묘도감제조(祔廟都監提調)를 겸직, 공역(工役)을 인정받아 가자되었다.

참고문헌

『철종실록(哲宗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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