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났다. 1928년 6월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중 일본 동경(東京)에서 조직된 조선농우연맹의 지부를 학교 내에 결성하고 대표가 되었다. 7월에 조선농우연맹 국내순회강연회에 참가하여 ‘농촌 파멸의 일단’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강연회는 해산되었고 그 뒤에 학생들과 계림농흥사, 조선개척사를 조직하였다.
10월 퇴학처분을 받았고 그 후 중국 연길현(延吉縣)용정(龍井)으로 가서 동흥중학(東興中學) 교사가 되었다. 1929년 10월 옌지현 다도구(茶道溝)에서 열린 ‘재동만(在東滿) 조선인공산주의열성자대회’에 참가하였고, 이때 동만 지도부의 정치부를 맡았다. 1930년 4월대성중학(大成中學)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사직하고 ≪중외일보(中外日報)≫ 용정지국을 운영하였다.
1930년 8월 북한으로 돌아와 신흥 성야광업(星野鑛業)의 사무원으로 취직하였다. 1931년 2월 광산노동조합조직준비위원회 결성을 주도하였고 조직책임자가 되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 공산청년동맹부 책임자가 되었고, 그 뒤에 검거를 피해 간도로 갔다. 1931년 10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동만특위로부터 ‘조선공산당 재건 공작 요항’ 및 각종 지원을 받고 11월 입국하였다.
1932년 1월부터 노동부·농민부·반제부(反帝部)·적색구원부(赤色救援部)·세포지도부를 조직하고 노동부 및 서기부 책임을 맡았다. 주로 서울시내와 부근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서울 시내 각 전문학교와 보성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중등학교에 조직된 독서회를 지도하였다. 함흥·인천·평양·명천에서 농민조합·노동조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기념일에 즈음하여 반일폭동을 준비하다가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934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광복 후 월북하였고 1952년에는 농업성 국영제5호농장 지배인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이후 농업부문 능력을 인정받아 1953년 10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농업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56년 4월평안북도 인민위원장에 기용되었고, 동시에 노동당 제3차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또 1957년 9월부터는 내각 농업상으로 활동하였으며, 1959년 2월 재일조선인영접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0월에 모든 직책을 내놓고 일선에서 물러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망일자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