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칠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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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현칠종 전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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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법제
인물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8년(고종 35)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함경북도 성진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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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내용

함경북도 성진 출신. 3·1운동에 참여하였다. 1923년 사상단체인 토요회에 참가하여 간부가 되었다 그 해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1926년 6월에 졸업하였다. 같은 해 10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입당하였다.

1927년 1월 전만(全滿) 당열성자대회에 참석하였고, 5월 조선공산당 동만(東滿)구역국 선전부장이 되었다. 7월 용정(龍井)에서 동만교육자강습회를 조직하고 당과 공산청년동맹의 정책을 강의하였다. 같은 해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28년 12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1932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1933년 8월 청진에서 함경북도 각지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함경북도 노동자농민(勞農)대표자회의를 개최하였다. 1934년 6월 청진에서 함북공산주의자동맹 결성을 주도하였고, 동맹 산하에 4개 지방위원회를 두고 노동자·농민운동의 활성화에 힘썼다.

11월 함북공산주의자동맹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검거되었다가 1945년 8월 춘천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광복 전에 항일유격대 대원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1945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된 열성자대회에 참석하여 남조선노동당의 거두로, 북한에서 1955년 12월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고 처형된 박헌영(朴憲永) 중심의 조선공산당 재건을 지지하였다. 1946년 1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산하 북조선농민동맹이 결성될 때 부위원장 겸 평남지역을 대표하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3월 북조선노동당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1951년 2월 조선농민동맹 부위원장을 거쳤다.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중앙검사위원회, 같은 해 5월 조선농민은행 총재에 임명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대남전위기구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戰線) 중앙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1957년 9월부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58년 6월 ‘노력훈장’을 받기도 하였으나 같은 해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서 해임되었다. 그리고 약 1년 뒤인 1959년 12월 박헌영과 사돈간이라는 이유로 종파에 연루되어 농목장으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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