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유령 전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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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백석읍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부원수 신각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최초로 승리한 전적지. 전승지.
시도자연유산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정진각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해유령 전첩지 전첩비 미디어 정보

해유령 전첩지 전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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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부원수 신각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최초로 승리한 전적지. 전승지.

내용

1977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蓮谷里)에서 파주 광탄(廣灘)으로 넘어가는 고개 길이다.

부근의 지세는 연곡리의 입구가 좌우로 낮은 산이 마치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 있어 산 위에 매복해 있으면 그 안으로 들어오는 적을 포위하여 섬멸할 수 있기 때문에 전략상으로 매우 주요한 지역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한강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신각은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과 함께 양주 산중으로 들어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았다. 또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李渾)으로부터 지원병을 얻어 북상하는 왜군의 선봉부대를 맞아 해유령 입구에서 전투를 벌여 왜군의 목 70여급(級)을 베는 큰 승리를 얻었다.

그러나 임진강으로 도망했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은 한강 패전의 책임을 신각에게 미루고 명령불복종죄로 무고하는 장계를 올렸다. 이에 우의정 유홍(兪泓)은 그 내용을 믿고 신각의 참형을 주창하여 양주에서 참살되었다.

뒤늦게 승전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형 집행을 중지하기 위하여 선전관을 파견하였으나 형 집행 후에 현장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2,000여 평의 대지 위에 높이 10.6m의 화강암으로 된 사각 기둥의 전첩비를 세웠다. 전첩비 앞에는 충현사(忠顯祠)가 위치하고 있다. 1991년에 세운 것으로 신각, 이양원, 이혼의 3위를 배향했다.

참고문헌

  • - 『양주군지』(양주문화원, 1992)

  • - 『경기문화재대관』(경기도,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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