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집중(執中), 호는 구만(龜灣). 홍명원(洪命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처심(洪處深)이고, 아버지는 정랑 홍수제(洪受濟)이며, 어머니는 송지렴(宋之濂)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에게서 수학하였다.
1702년(숙종 28) 진사시에 합격하고, 군수를 지냈다. 1719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이 되었다. 재직 중 농지 재측량 제도의 폐지령과, 지방에서 징수해 수송해 온 쌀을 재차 두량(斗量)하는 부조리한 정책에 대해 상소하였다. 또한 상민들의 양역(良役)을 변경할 것도 상소하였다.
같은 해 세자대리청정에 대해 의견을 상소했으며, 정언이 되었다. 1720년 지평으로서 세자(景宗)에게 글을 올려 노쇠한 무신들을 등용하지 말도록 청했고, 곧이어 헌납·집의가 되었다. 또한 강연(講筵)을 열어 유신(儒臣)들을 자주 접해 학덕(學德)·공업(功業)을 부지런히 하도록 소청하였다.
1721년 충청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음사로 늦게 등과해 재학(才學)도 모자라고 명론(名論)도 알려진 것이 없는 그가 이러한 직임을 받는 것은 잘못이라는 논박을 받기도 하였다.
그 해 통제사 이수민(李壽民)과의 체모를 잃은 충돌로 추고(推考)를 당하였다. 그리고 1722년에는 지평 박필몽(朴弼夢)에 의해, 등과한 달에 누이의 상을 외면했다는 것과 감사로서 수탈, 부정축재가 심하다는 내용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어 전주에서 은거하였다.
곧이어 장령 이경열(李景說)이 그의 이름을 관원명부에서 아주 삭제할 것을 주청했다. 그리고 소론 일색인 사헌부의 계(啓)로 다시 관원명부에서의 삭제가 요구되었다. 1723년 지평 조지빈(趙趾彬)에게 다시 탄핵을 받았고, 1724년에는 정주(定州)로 귀양을 갔다.
1725년 지사 민진원(閔鎭遠)이 서용(敍用: 죄를 지어 벼슬을 면한 사람에게 다시 관직을 주어 씀.)을 주청한 결과, 복직해 판결사가 되었다. 그리고 대사간·공조참판으로 발탁되었다. 그 해 11월에 최규서(崔奎瑞)를 탄핵하는 소를 올렸다.
그리고 1726년에는 임금이 심성 수양에 철저하지 못한 것을 직간하였다. 1727년 수원부사로서 소론의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최석정(崔錫鼎) 등을 숙종의 묘정에서 출향할 것을 주장하다가 삭탈관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