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정희 ()

무용
인물
해방 이후 한국발레연구회 이사장, 이화여자대학교 체육학과 교수 등을 역임한 무용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934년 1월 9일
사망 연도
1997년 2월 12일
출생지
전라남도 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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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해방 이후 한국발레연구회 이사장, 이화여자대학교 체육학과 교수 등을 역임한 무용가.
내용

전남 목포 출신. 아버지 홍주표와 어머니 김이순의 3남3녀 중 셋째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무용을 시작하여 12세가 되면서 목포여자중학교 무용교사 정춘자(일본 다까라스까예술학교)에게 본격적으로 무용지도를 받았다.

생애

영특하고 예쁘게 생긴 외모로 학교예술제에 출연하여 탁월한 소질을 나타냈으며, 당시 목포 평화극장에서 무용 공연을 통하여 관객을 감탄케 하고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중학교 시절 영어웅변대회에서 수상을 할 정도로 실력이 우수하였으며 총명한 인물로 칭송을 받았다.

1953년 이화여자대학교 최우수장학생으로 무용과에 입학하여 박외선에게 사사했으며 1956년 이화여자대학교 우수졸업생으로 특출한 두뇌와 춤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1958년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여 최초의 석사무용가가 되었다. 그 해 제1회 무용발표회를 이화여대 강당에서 갖게 되었으며, <사슴호의 전설>·<승무>·<탈춤>·<월요일의 기도> 등의 작품으로 무용계에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1959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 체육학과 교수로 첫 부임하였고, 1991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에 몸담아 왔다. 1988년 경희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하였다.

활동사항

1970년 제3회 무용발표회에서 애달픈 그리움의 존재인 어머니의 죽음을 <조용한 대답 ’70>의 무용으로 국립극장에서 발표하였다.

1971년∼1974에는 지역사회 개발을 위한 지방 순회공연, 1981년에는 지체 부자유자를 위한 자선공연 등을 통하여 개척자로서의 발레 보급과 저변확대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71년 11월 제4회 무용발표회(국립극장)에서 한국 발레의 대표 작품으로 손꼽히는 안익태(安益泰) 작곡의 <코리아 환상곡>을 창작 발레화하였으며, 한국적인 발레를 향한 뜨거운 집념이 그의 예술세계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 선구자 역할과 더불어 후진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75년, 1977년 ICHIPER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구미지역 무용계를 시찰하였으며, 1979년대말과 1981년 일본의 쯔꾸바대학교 및 무용계 시찰을 하였고, 1981년 이화창립 100주년을 위한 미국 순회공연과 1984년·1990년 프랑스 Perpignan시, Carcassonne시에서 초청공연을 하였으며 1991년 러시아 Moscow, Leningrad시의 청소년 문화부초청 공연으로 <장생도>·<코리아 환상곡>를 공연하여 한국의 위상을 국제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프랑스·미국·러시아 등 국제 워크숍 참가와 초청으로 효율적인 인재 양성을 주관하였으며 과학적 연수제도의 활성화와 장려로 한국 무용의 국제교류관계를 유지·발전시켜 왔다.

대표작으로는 <조용한 대답 ’70>·<코리아환상곡 ’71>·<청률 ’74>·<아가 ’78>·<어떤 괘적 ’82>·<원화 ’83>·<심저 ’84>·<50흔적 ’85>·<신시 ’88>·<장생도 ’88>·<녹색의 불길 ’90> 등이 있다.

그의 이 작품들은 그의 위상과 예술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전통적 고전원리에 바탕을 두었고 이념적 측면에서는 항상 민족 발레 창건을 위한 이론과 방법론적 위상 정립에 정열을 쏟았다.

1969년 DSSC(Dance Society Service Club)를 창단하여 무용이론 특강과 실기, 그리고 인접 예술과 만남의 장을 마련하여 젊은 무용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었으며, 1980년에 발레 블랑(Ballet Blane)으로 명칭을 새로 바꿔 예술감독으로서 공간소극장을 통한 창작 발레를 주도하며 운영해 왔다.

1984년 한국발레연구회를 발족 및 창립하여 국립극장에서 창단기념 공연을 가졌고 이사장으로서 한국 발레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1985년부터 한국발레연구회지 발간을, 1987년부터 학술세미나 등을 개최하여 학문적인 이론 정립에도 선구자 구실을 해왔다.

1988년≪무용역사를 통해 본 그의 예술성과 교육적 기능≫을 번역 발간하였으며, 1988년 2월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이학박사를 취득하여 <백조의 호수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의 이런 면학의 역정은 배움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으려는 자기 탁마의 정열을 보여 준다.

1988년까지 제15회의 개인발표회를 가졌으며, 1994년 국립극장에서 그의 제자들로 구성된 실행위원이 마련한 ‘홍정희 발레 35주년 기념’ 공연에서 <코리아 환상곡>에 출연하여 마지막 무대를 정열적인 춤으로 장식하였다.

공로 수상 내역은 1977년 외국 무용부 공로상 수상과 1984년 프랑스 깔까손시장 문화메달 수상, 1984년 11월 제33회 서울특별시 문화상수상, 1985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한국 발레의 선구자로서 씨뿌리는 여인으로 불리며 한국 발레의 세계를 가꾸어 발전시켜 온 인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홍정희의 작품세게에 나타난 민족주의 성향분석-「코리아 판타지」와 「장생도」를 중심으로」(한경자,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홍정희 작품세계에 나타난 안무 성향에 관한 연구- 한국민족발레 작품을 중심으로」(정경미,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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