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유재(有哉), 호는 노포(老圃). 이조판서 홍처량(洪處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구서(洪九叙)이고, 아버지는 홍이도(洪以度)이며, 어머니는 최방(崔汸)의 딸이다. 홍상도(洪尙度)에게 입양되었다.
1706년(숙종 3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707년에 지평·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 당의(黨議)에 관련되어 이덕영(李德英)의 장계에 이의를 제기하고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그 이듬해에도 한재(旱灾), 행전(行錢: 물건의 유통과정에서의 돈을 주고 받음), 각 관사 아전들이 오랜 동안 그 자리에 있으면서 저지른 폐단 등 시무에 대해 상소하였다.
1710년 장령이 되어서는 전라우수사 윤정주(尹廷舟)와 해곤(海閫)에 제수된 조이중(趙爾重)에 대하여 국방상 적합한 인물이 되지 못한다고 반대하고 언관들을 함부로 파직, 삭직, 먼 지역으로 유배시킨 데 대하여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그 해 진해현감으로 나갔다가 1711년 사복시정이 되었는데 부하직원의 독직사건으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정언에 복직되고, 장령을 거쳐 1713년 필선·장령·정언을 거쳐, 이듬해 헌납, 1715년 집의·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신임사화로 삭직되었다가 1725년(영조 1) 우부승지·충청도관찰사·경기도수군절도사·좌부승지를 거쳐, 1734년 함경도병마절도사, 1744년 한성부판윤을 끝으로 기로소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