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 ()

인문지리
지명
경기도 서남단 해안가에 위치한 시.
정의
경기도 서남단 해안가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용인시, 서쪽은 황해, 남쪽은 평택시·오산시, 북쪽은 바다를 거쳐 안산시·시흥시·군포시·수원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6°31′∼127°09′, 북위 37°00′∼37°17′에 위치하며, 면적 689.7㎢, 인구 88만 1154명(2021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은 4개 읍, 10개 면, 10개 행정동(16개 법정동), 525개 행정리(177개 법정리)로 되어 있다. 시청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에 있다.

자연환경

광주산맥의 끝이 북부로 뻗어 지나고 있어 동쪽과 북쪽에는 200∼400m의 산지가 솟아 있고 남부와 서부는 낮은 구릉이 넓게 펼쳐져 있다. 해안과 하천 주변에는 해안평야가 있고 해안가에는 간석지가 발달해 있다. 동쪽에는 칠보산(七寶山, 239m)·성화산(439m) 등이 수원시와 접해 있고, 서쪽에는 와룡산(臥龍山, 405m)·창명산(155m)이 해안가에 연해있으며 북쪽에는 해안산(126m)·수리산(475m), 중앙에는 비봉산(185m)·태행산(太行山, 235m)·태봉산(泰峰山, 236m)·성화산(139m) 등 100m 정도의 낮은 구릉이 곳곳에 솟아 있다.

시의 주천(主泉)인 발안천(發安川)이 아오천·두곡천에 합류되고, 이것이 서남진하여 남양호에 흘러들어 가면서 주변에 넓은 해안평야를 만들고 있다. 동쪽에는 진위천(振威川)이 정남향으로 흘러 아산호로 흘러들어 간다.

해안선은 비교적 복잡하고 해안에는 남양(楠楊)·조암(朝巖) 등의 반도와 남양·분향(汾鄕) 등의 만이 발달해 있으며 연해에는 제부도(濟扶島)를 비롯하여 여러 섬들이 있다.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고 바다는 멀리까지 얕아 항구가 발달하지 못하고 있다. 송산·마도·우정·장안면에는 해안 간석지가 넓게 발달하고 있는데, 이들 간석지는 강우량이 적고 일사량이 많은 자연조건을 이용하여 염전으로 이용되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10.9°C, 1월 평균기온 -5.1°C, 8월 평균기온 25.6°C이며, 한서(寒曙)의 차가 30°C를 넘는다. 첫 서리는 10월 하순에, 마지막 서리는 다음해 4월 초에 내린다.

역사

수원시 서둔동 여기산 일대와 팔탄면·양감면·동탄면·서신면·마도면 등지에서 돌칼·철촉·토기 등 신석기 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다수 발굴됨으로써,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시내 여러 곳에서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내에는 현재까지도 26군데에 산신제의 유습이 남아 있는데, 이로 보아도 이 같은 사실이 입증된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원양국(爰襄國)과 상외국(桑外國)이 남양부(南陽府)와 쌍부현(현재의 남양반도와 우정읍·장안면 일대)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유하고 있던 5세기 말엽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는 고구려의 매홀(買忽)로 불리었으나 757년(경덕왕 16) 9주(州)를 두고 군·현으로 명칭을 고칠 때 수성군(水城郡)이라 하였다. 남양은 고구려의 당성군(唐城郡)에 해당하던 지역으로, 신라 경덕왕이 당은군(唐恩郡)이라 개칭했던 것을 흥덕왕 때 없애고 진(鎭)을 설치하였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공략하기 위하여 남정(南征)할 때 김칠(金七)·최승규(崔承珪) 등 200여인이 귀순하였다. 그 덕으로 934년(태조 17)에 수주(水州)로 승격되었으며, 995년(성종 14)에는 도단련사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없앴다. 이때 고을의 명칭은 한남(漢南) 또는 수성(隋城)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1018년(현종 9)에 지수주사(知水州事)를 둠과 동시에 정송(貞松)·용성(龍城)·광덕(廣德)·쌍부 등의 현을 영속시켰다.

1271년(원종 12) 몽골병이 대부도에 침입하였을 때, 섬주민들이 몽골병을 죽이고 부사 안열(安悅)이 이를 평정시켰다고 하여 그 공으로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 뒤 도읍이 겪은 여러 사건에 따라 승격 또는 강등되는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었으나 비교적 오랫동안 수원이라는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1362년(공민왕 11) 홍적(紅賊)이 침입하였을 때 고을사람들이 이들을 도와 적이 세력을 떨치게 했다는 이유로 부에서 군으로 다시 강등되었다가 뒤에 다시 부로 승격되었다.

남양은 고려 초기에 옛 명칭인 당은군이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는 수주군에, 그 뒤에는 인주군에 속하게 되었다. 1172년(명종 2)에는 감무를 두었고 1290년(충렬왕 16)에는 원나라의 관리로 있던 홍다구(洪茶丘)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지익주사(知益州事)로 승격되었다. 뒤에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가 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 모든 목(牧)을 없앨 때 남양부로 강등되어 조선 초기까지 별다른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1394년(태조 3)의 한양천도로 양광도에서 그 이듬해 경기도에 편입되었으며, 1413년(태종 13) 도호부가 되었고, 1456년(세조 2)에 판관을 두어 진으로 하면서 경사(京師) 수호를 하는 보(輔)의 한 곳이 되었다. 1526년(중종 21)에는 고을에서 부모를 죽인 사건이 발생하여 군으로 강등되면서 진을 혁파하였고, 그 뒤 인천에 속했다가 1535년 다시 복구되었다.

남양은 1413년(태종 13)에 다시 도호부가 되고 1644년(인조 22)에 현이 되었으나 1653년(효종 4)에 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1661년(현종 2)에 주인을 죽인 하인이 있어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74년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의 지방관제 개정으로 군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경기도관찰부의 소재지가 되었다가 1910년 경술국치 후 서울로 이전되었다. 『수원군읍지』에 따르면 1899년 당시의 호수는 1만 2579호, 인구는 4만 9708인이고, 40개 면에 449개 리가 있었다고 한다.

1931년에는 수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남양은 1895년에 수원군과 함께 인천의 속군이 되었다가 다음해 경기의 4등군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영흥면·대부면이 부평군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수원군에 병합됨으로써 남양군은 없어지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어느 곳보다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이 치열하였으며, 일본군에 의한 제암리교회 참변사건은 가장 처참했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근대의 인물로는 제암리교회에서 순사한 안종후(安鍾厚) 등 23인, 그리고 독립운동가인 문상익(文相翊)·김교철(金敎喆)·홍원식(洪元植) 등이 있다. 또한 민족음악의 선구자인 홍난파(洪蘭坡)와 문학가 홍사용(洪思容)도 이곳 출신이다.

1949년 수원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나머지 지역은 수원군에서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60년 1월 1일 오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63년 1월 1일에 일왕면이 시흥군과 수원시로 각각 분할 편입되고, 태장면의 3개 리와 안룡면의 5개 리가 수원시로 편입되는 한편, 태장면의 5개 리와 안룡면의 6개 리를 병합하여 태안면을 신설하였다.

1970년 6월 10일 수원시에 위치했던 군청사를 오산시의 신청사로 이전하였으며, 1983년 2월 15일 반월면의 2개 리가 시흥군 의왕면에, 비봉면 상기리가 봉담면에 편입되었다. 1985년 10월 1일 태안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7년 1월 1일에는 서신면 심곡리가 송산면에, 동탄면 금곡리가 오산읍에 편입되는 등 군내·외와의 많은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1989년 1월 1일 오산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다. 1994년 12월 26일태안읍 영통리 일원, 신리·망포리 일부, 반월면 당수리·입북리가 수원시로 편입되고, 반월면의 건곤리·사사리·팔곡리가 안산시로, 둔대리·속달리·도마교리·대야미리가 군포시로 각각 분할 편입되었으며, 1995년 4월 20일에는 태안읍 신리·망포리가 수원시로 편입되었고 1998년 4월 1일에는 봉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1년 3월 21일에는 화성군이 시로 승격되었으며, 남양면이 시에 속하게 되면서 면이 폐지되었다. 2003년 6월에 우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6년 1월 1일 태안읍이 4개의 행정동으로 분리되고 태안읍은 없어졌다. 2007년 1월 29일 향남면이 향남읍으로 승격되었다.

유물·유적

팔탄면 율암리, 양감면 용소리, 동탄면 중리, 서신면 홍법리, 마도면 해문리 등지에서 돌칼·철촉·토기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산성으로는 서신면 광평리의 남양장성, 상안리의 당성(사적, 1971년 지정)을 비롯하여, 안녕동의 수원 고읍성(경기도기념물, 1986년 지정), 우정읍의 화산 토성지, 향남읍의 요리성지, 봉담읍의 수기리 토성지와 덕리의 서봉산봉수, 마도면 백곡리의 토성이 있으며, 봉수로는 송산면 독지리의 해운산 봉수, 서신면 상안리의 염불산 봉수, 우정읍 화산리의 흥천산 봉수 등이 있었다.

유교문화재로는 남양읍에 남양향교, 서신면 상안리에 안곡서원(安谷書院), 송시열(宋時烈)을 모셨던 매곡 서원지(梅谷書院址), 팔탄면 창곡리의 금산사(金山祠) 등이 있다.

또 고가옥으로는 서신면 궁평리의 화성 정시용 고택(국가민속문화재, 1984년 지정)·화성 정수영 고택(국가민속문화재, 1984년 지정), 송림동의 정원채 고가(경기도 민속문화재, 1985년 지정), 정남면 문학리의 홍승인 고가(경기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등이 있으며, 노인들의 휴식처인 남양읍의 남양기로소도 있다.

이밖에 안녕동의 융릉·건릉(사적, 1970년 지정), 향남읍의 제암리 삼일운동 순국유적(사적, 1982년 지정), 남양읍의 윤계선생 순절비(경기도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화성 남양리 신빈김씨(愼嬪金氏)묘역(경기도기념물, 1994년 지정)이 있고, 비봉면 남전리의 남이 장군묘(경기도기념물, 1973년 지정), 봉담읍 왕림리의 서거정선생 묘지석(경기도유형문화재, 1989년 지정), 기안동의 백천장선생묘(경기도 기념물, 1985년 지정), 안녕리의 만년제(경기도기념물, 1996년 지정), 동탄면 영천리의 남계 박세채 영정(경기도유형문화재, 1996년 지정) 등이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향남읍 구문천리에 부의주(경기도무형문화재, 1987년 지정)가 있으며, 양감면의 정문리 느티나무, 남양면의 남양리 홰나무 등 많은 고목들이 있다. 송상동의 용주사 화양나무는 1979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2년 수형 훼손과 노회로 인하여 지정 해제되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1397년(태조 6)에 남양읍에 창건된 남양향교가 있다. 1667년(현종 8)에는 남양현감이 서신면 상안리에 안곡서원을 세웠으나 고종 때 철폐되었다가 1976년에 건물이 복원되었다. 이밖에 매송면 천천리에 송시열을 모셨던 매곡서원과 팔탄면 창곡리에 1871년 건립된 금산사가 있어 이 지역 교육을 담당하였다.

신교육기관으로는 1899년 남양공립소학교가 개교된 뒤 1913년 오산공립보통학교(지금의 성호초등학교), 1920년 송산공립보통학교(지금의 송산초등학교), 1921년 태장공립보통학교(지금의 태장초등학교)와 팔탄공립보통학교(지금의 팔탄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뒤 1개면 1개교의 교육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중등교육기관으로는 8·15광복 후인 1948년에야 오산중학교가 설립되었고, 이어 송산중학교·화성여자중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76개교, 중학교 34개교, 고등학교 21개교, 특수학교 2개교와 수원과학대학교, 장안대학교, 수원가톨릭대학교, 수원대학교, 협성대학교가 있다. 1964년에 개원한 화성문화원은 각종 문화·예술행사를 주관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매홀문화제의 개최 등 향토문화의 계승·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대표적 민속놀이는 배연신굿이다. 이 굿은 황해도 해안지방이나 도서지방에서 배의 무사고와 풍어를 빌기 위하여 행하던 대동굿인데, 이 고장 역시 바다에 나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 매년 봄 출어기가 되면 배를 소유하고 있는 집이 주축이 되어 이 굿을 성대히 거행한다.

이 굿은 신청올림·당산맞이·부정풀이·초부정과 초잠홍·영정물림·소당제석·먼산장군거리·대감놀이굿·그물올림(영산할아범과 할멈굿)·쑹기주는굿·다리발용신굿·강변놀이굿 등 12거리 굿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굿을 하는 배에 임경업 장군기·산신님기·서낭당님기를 앞세우고 30∼40명의 인원으로 편성되어 놀이를 펼치게 된다. 처음 출어를 할 때나 만선이 되어 귀항할 때에도 남녀노소가 모여서 한데 어울려 놀이를 한다. 이밖에도 두레놀이 및 연날리기·널뛰기·윷놀이 등의 세시(歲時) 놀이가 전한다.

동제로는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남면 발산리의 발이산〔鉢山〕 산신제가 유명하다. 이 산신제는 매년 음력 10월 1일 자정에 발이산 중턱에 있는 소나무숲으로 둘러진 당집에서 거행된다. 제물로는 소 한마리를 통째로 바치고 조라술을 올리는데 제물의 진설과 제의절차가 엄격하다.

제관은 상제관·축관·집행관 등 모두 5명을 제사날 7일 전에 선출하며 이들은 그때까지 목욕재계하고 근신하여야 한다. 이 산신제는 음식을 차려 먹거나 농악을 울리는 일이 없이 엄숙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며, 제가 행하여지는 동안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동네의 출입을 금지하는 등 부정한 일이 없도록 특별히 규제한다.

이밖에도 정남면에 9군데, 팔탄면에 1군데, 양감면에 6군데, 동탄면에 7군데, 서신면에 1군데, 우정읍에 1군데, 송산면에 1군데, 향남읍 1군데 등에서 산신제·당제·정제가 거행되는데 제의 방법은 발이산 산신제와 대동소이하다.

설화·민요

이 고장에는 「봉림산 봉혈(鳳穴)전설」·「북양리 충절비 전설」·「나주정씨 효자비 전설」 등 지명과 충효에 얽힌 설화가 다수 전한다. 시의 북양동에 있는 봉림산에는 봉혈이라는 굴이 있는데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태종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굴에 살고 있는 봉황을 보기 위하여 솔잎을 따다 불을 지르고 연기를 굴 속으로 피워 넣었다.

그러자 연기가 가득한 굴 속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왔는데, 그 때 굴 안을 쳐다보던 청태종의 왼쪽 눈을 치고 사라졌다. 그래서 청태종은 결국 봉황은 보지 못하고 한쪽 눈만 멀게 되었다는 것이다.

같은 마을에 있는 충절비에는 흥선대원군과 한 노인에 얽힌 유래담이 전해온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군사에 의하여 중국으로 압송당할 때 송산면 마산포로 향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의관을 정제한 어떤 노인이 대원군 일행의 앞을 가로 막으며 “만백성을 두고 홀로 떠나시면 이 나라는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하면서 통곡하였다.

대원군도 같이 눈물을 흘리며 훗날을 기약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환국한 흥선대원군이 그 노인을 찾았으나, 그때 노인은 이미 죽었으므로 대원군은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충절비를 세우게 되었다.

신남동의 나주정씨 효자비에 100여년 전 이 마을에 살았던 효자의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그는 어머니가 몸져눕게 되자 수십리의 산길을 걸어다니며 읍내에 있는 의원에게서 약을 지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그의 효성에 감동한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업고 읍내까지 데려다주곤 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지네들이 독을 품어 왜구들을 물리쳤다는 「지네산전설」, 마고할미가 육지에서 돌을 날라 쌓았다는 「형도(衡島) 탑전설」, 중을 한 사람 잡아넣고서야 어려운 공사를 완성할 수 있었다는, 송산면 용포리의 「용수동(龍水洞) 제방전설」, 시주승을 학대하다가 벌을 받아 못이 되었다는 정남면 귀래리의 「방아못전설」 등이 전한다.

이 고장에 구비전승되는 민요는 노동요·의식요·여요·신앙성요 등 많은데 노동요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그 중에도 모심기소리와 논매기소리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 고장의 향토색을 잘 나타내는 노래로는 논매기소리인 「얼카덩어리」·「면생이」·「몬돌이」·「선소리」 등과 신앙성요인 「목살경」·「고사반」, 여요인 「자장가」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도 대표적인 것은 「면생이」이로, 4, 5명이 한 조가 되어 교대하면서 부르는데, 이 노래는 가락이 아주 길고 높게 뻗으며 가사는 없고 후렴구 일변도의 보기 드문 특수한 형식으로 그 가락이 매우 구성지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응∼아∼/ 오우∼우/ 에에∼/ 오오∼/ 아∼아∼에∼/ 에에∼에∼(선창//응아∼아(교대 후창)/ 우∼∼/ 에에∼에 우∼우/ 오오∼/ 아∼아∼에∼/ 에에∼에∼”이다.

이밖에 「선소리」와 「몬들이」도 이와 비슷하나 가사가 가끔 끼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얼카덩어리」를 일부 소개하면 “얼카덩어리/ 얼카덩어리(후렴)/ 우여차데기/(후렴 생략)/ 저건너 갈미봉에/ 비가 가무랗게/ 몰려온다/ 우장을/ 허리에 둘러/ 김―매러/ 갈 것인가/ 가는구나/ 가는구나/ 떨쳐버리고/ 내가 간다.”이다.

「얼카덩어리」의 후렴은 김매는 시늉을 나타낸 그 가락이, 선창자가 가사를 부르면 다른 사람들이 사이사이 이것을 제창하면서 논을 맨다. 가락은 단조롭고 느리나 일의 속도에 따라 조정된다. 가사의 내용은 젊어서 실컷 놀자는 것과 임을 그리워하는 연정을 읊은 내용이 많고 일부 인생을 자연의 순리에 비유한 표현이 뛰어나다.

그 다음 「자장가」의 일부를 소개하면 “일가간에 화목동이/ 부모에는 효자동이/ 나라에는 충신동이/ 우리애기 잘도잔다/ 하늘나라 신선동이/ 잘도 자는구나.”이다. 4음, 2음보가 정연한 음영민요로 고요하게 잠자며 꿈꾸는 어린이의 청순한 모습을 그림 그리듯이 잘 표현한, 낭만성이 뛰어난 노래이다.

그리고 「범벅타령」도 월별로 떡타령을 하다가 끝에 가서 “섣달에는 흰떡범벅/ 이도령 잡수실 맵쌀범벅/ 김도령 잡수실 찹쌀범벅.”과 같이 끝나는, 해학성의 뛰어난 노래이다.

또한, 신앙성요인 「목살경」은 악귀를 겁주어 쫓는 내용의 경으로, 무격신앙의 일단을 잘 표현한 걸작이고, 「고사반」은 일종의 염불소리로 가내의 평안과 부귀공명을 기원하는 내용을 잘 표현한 뛰어난 작품이다.

산업·교통

전토지의 38.1%가 임야이고 37.0%가 경지로 도내에서 경지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저수지로는 발안저수지·지천저수지·대성저수지·보통저수지 등이 농업 관개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비교적 넓은 경지가 있고 수리시설도 잘 발달되어 있는데 경지 중 논 1만 6782㏊, 밭 8,662㏊이며, 주요 농작물은 쌀 이외에 밭작물로 고추·배추·무·파·마늘·당근·참외·수박·상추·토마토·시금치, 과실류로 복숭아·배·포도·사과, 특용작물로 참깨·땅콩·들깨 등이 생산되며, 축산업은 젖소·한우·돼지·닭 등이 많이 사육되고 있다.

그리고 해안 지역에서는 천일제염업도 활발하다. 최근까지 우리나라 소금 생산의 3분의1 이상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노동력 부족, 해수의 오염 등으로 생산량이 계속 줄고 있다.

수산물로는 굴·바지락·새우·조기 등이 잡히며, 우읍도 등에서는 굴과 가무라기의 양식도 활발하다. 임산물로는 밤·도토리·대추·은행, 그리고 표고버섯이 생산되고 있다.

농업인구는 전체 인구의 11%이고 제조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27.7%이다. 주요 광산물은 규석·고령토 등이 생산되고 있다. 대도시와 인접해 있고 고속도로변에 인접에 있어 최근 공업화가 빨리 진행되고 있는데 주요 제조업은 조립 금속업, 전기, 전자공업, 화학 공업, 비금속 공업, 섬유공업, 식료품 공업이 발달되고 있다.

상업시설로 정기 시장, 상설시장, 연쇄점이 있는데, 정기시장은 남양읍의 남양장이 1·6일, 향남읍의 발안장이 5·10일, 우정읍의 조암장이 4·9일, 송산면의 사강장이 2·7일에 열린다. 발안장은 우시장으로 남양장은 바지락·꽃게·굴 등 해산물 시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소득의 증가, 교통기관의 발달 등으로 점차 쇠퇴하고 있다.

도로는 경부고속도로가 동쪽의 동탄면을 남북으로 지나고 서해안고속도로가 서쪽에서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국도 1호선이 고속도로와 나란히 북상하고 있다. 국도 39호선이 서해안고속도로와 나란히 남북으로 지나고 국도 43호선이 향남읍에서 33호선과 분기하여 동북진하고 국도 42호선이 반월면을 동서진하여 국도 43호선과 수원시에서 합류한다. 철도는 경부선이 국도 1호선과 나란히 남북으로 지나고 협궤철도인 수인선이 매송면을 동서로 지나고 있었으나 1994년 철거되었다. 2016년에는 수서와 평택을 잇는 수서평택고속선이 개통하여, 화성시를 지나고 있다.

관광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발달한 칠보산·서봉산·대봉산이 화성땅을 감싸면서 주변에 관광지를 발달시켜주고 있다. 특히, 수원·화성·안성과 연계된 관광유적지가 많다. 이 곳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들이 발굴되면서 고유한 문화를 형성해온 유서 깊은 고장으로 알려졌다.

화성은 본래 수원이 포함된 고장이었는데, 이 고장의 중심지는 지금의 화성 화산릉 일대로 알려져 있다. 화성땅은 팔달산 아래에 있던 읍치(邑治: 수령이 파견되어 근무하는 곳)가 1949년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서쪽의 외곽에서 수원을 감싸주고 있으므로 수원시와 공유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유산으로서의 관광지를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화성시는 수원과 더불어 조선 후기 문화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1789년 정조가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성군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성을 비롯한 성곽문화를 탄생시키고,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자 원찰로 삼은 곳이 이곳 용주사이다.

또한 이곳에는 그 당시 김홍도가 부모은중경이란 목판 원화를 그려, 뒷날 문화유산을 창출해 낸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화성과 오산의 경계지역인 석대산에는 권율 장군의 대첩 일화가 간직되어 있는 독산성과 세마대가 있고, 서신면 상인리에는 독특한 복합산성인 당성이 있어 관광객이 자주 찾고 있다.

또한 안녕동에는 융건릉이 있고, 합장릉으로 알려진 융릉과 건릉이 있으며, 송산리에는 용주사가 있는데 범종과 부모 은혜에 대한 불교경전인 부모은중경판이 소장되어 있어 훌륭한 문화 관광지가 되고 있다. 이 경전에는 부모의 은혜를 10가지로 제시하고, 보은의 어려움을 8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보은의 방법으로는 남에게 베풀고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 제일의 덕이요 바른길이 되지만 불효를 저지르면 틀림없이 지옥으로 간다는 경전의 내용을 목판에 새겨둔 것이다. 목판 부모은중경은 용주사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좋은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읍·면
  1. 봉담읍(峰潭邑)

시의 중북부에 위치한 읍. 면적 42.75㎢,인구 6만 8539명(2015년 현재). 읍소재지는 상리이다. 본래 수원군 지역으로 삼봉산의 이름을 따서 삼봉면이라 하여 내동·상동·수영 등 9개 리(里)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갈담면(葛潭面)을 합쳐 15개 리가 되었고 삼봉과 갈담의 이름을 따서 봉담면이 되었다. 그 뒤 1949년 화성군으로 편입되고, 1983년비봉면(飛鳳面) 상기리(上箕里)를 합쳐 1998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이 편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중서부에 반상변성질편마암도 분포한다. 산은 중서부에 건달산(乾達山, 237m), 남서부 경계에 철마산(鐵馬山, 164m), 남동쪽 경계에 서봉산(棲鳳山, 249m)이 솟아있다. 나머지 지역 대부분은 평지에 가까운 저지대이다. 동부를 관류하는 동화천(桐花川)과 북부를 흐르는 남전천(南田川) 유역에 충적평야가 분포한다.

논농사가 밭농사에 비해 약간 많은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과 호밀 등의 잡곡 이외에 잎담배의 생산량이 많고 밤·호두·대추 등의 과일류가 있다. 이밖에 과일류 재배량도 적지않다. 곳곳에 널려 있는 구릉지에 한우·젖소·돼지 등이 사육되고 있다. 상리에 납·아연을 생산하는 광산이 1개 있다.

대도시인 수원시에 인접한 지리적인 잇점을 살려 섬유·화학·기계 등 다양한 업종이 있으나, 북서부 전체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있는 관계로 제조업 발전에 제약조건이 많다. 교통은 43번 국도가 남단에서 중앙을 거쳐 북동쪽으로 계속 이어지고, 338번 지방도가 인근 비봉면과 연결되면서 서부를 통과한다.

문화유적은 수기리에 홍법사(洪法寺)와 터도 남아 있다. 분천리에 나씨고가(羅氏古家), 마하리에 고분이 있다. 상(上)·내(內)·수영(水營)·동화(桐化)·와우(臥牛)·수기(水機)·분천(汾川)·왕림(旺林)·세곡(細谷)·당하(堂下)·마하(馬霞)·유(柳)·덕(德)·하가등(下加等)·덕우(德佑)·상기(上箕) 등 16개 리가 있다.

  1. 우정읍(雨汀邑)

시의 서남단에 위치한 읍. 면적 59.70㎢, 인구 1만 8088명(2015년 현재). 면소재지는 조암리이다. 본래 수원부 지역으로 고려 때 사정향이 있었으므로 사정면 또는 마정이라 하여 일·이·삼 등 8개 리를 관할, 1895년 남양군에 편입되어 우정면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압정면(鴨汀面)의 9개 리와 국화도를 병합하여 우정과 압정의 이름을 따서 우정면이 되었다. 1949년 화성군으로 편입되었다. 2003년 6월 읍으로 승격되었다.

동부를 제외하고는 남양만에 인접한 해안지역인 관계로 농도(籠島)·응도(鷹島)·방도(防島) 등 여러 섬을 포함하고 있다. 높은 산지는 없지만 남동쪽에 봉화산(烽火山, 61m), 남부에 보금산(寶金山, 61m) 등이 솟아있다. 충적층이 폭넓게 분포하며 평지의 대부분은 해안평야 및 충적평야로 구성되어 있다. 경지면적이 넓은 대표적인 면 중의 하나로 밭농사와 논농사가 비슷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잡곡을 비롯하여 대추·호두·잣·은행 등과 고추·마늘의 생산량이 많다. 과수로는 사과·포도를 들 수 있는데, 특히 멱우리 일대에서 재배되는 사과는 당도가 높고 비타민과 무기질의 함유량이 높아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해안으로 둘러싸인 지역인 만큼 어업이 크게 발달하여 수산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물론 동력어선 보유수는 다른 읍면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바지락·꽃게·새우 등이 많이 어획되며 천일제염을 통한 소금생산량도 상당히 많은데, 특히 원안리 일대에서는 말린 낙지의 산출량이 많다. 광공업 분야로 제조업체와 대기업 자동차공장이 있다.

교통은 302·321·332·345번 등의 지방도가 면의 곳곳을 연결하고 있어 인근 지역과의 교통이 편리하다. 특히, 이화리에서 평택시 포승면에 걸친 남양호방조제의 완공으로 지역경제의 새로운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밖에 1·3번 군도 등 도로망이 점차 정비되고 있다. 문화유적은 이화리에 보덕사(普德寺), 멱우리에 화운사(華雲寺), 화수리에 봉래사(蓬萊寺) 등이 있으며, 화산리에 봉수지가 있다.

조암(朝巖)·원안(元安)·호곡(虎谷)·운평(雲坪)·한각(閑角)·멱우(覓祐)·화수(花樹)·주곡(珠谷)·이화(梨花)·석천(石川)·매향(梅香)·국화(菊花)·화산(花山) 등 13개 리가 있다.

  1. 향남읍(鄕南邑)

시의 남부에 위치한 읍. 면적 50.00㎢, 인구 6만 7824명(2015년 현재). 면소재지는 행정리이다. 본래 수원군 지역으로 남면이라 하였고 상수직·하수직·백토 등 14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공향면(貢鄕面)과 남곡면(南谷面)·감미면(甘味面) 일부, 남양군 분향리면(分鄕里面) 7개 리를 병합하여 20개 리로 개편되고 공향과 남면의 이름을 따서 향냠면이 되었다. 1949년 화성군으로 편입되고, 1987년팔탄면(八灘面) 지월리 일부를 편입시켜 장짐리가 신설되었다. 1993년 면사무소를 평리에서 행정리로 옮겼다. 2007년 1월 29일 향남읍으로 승격 되었다.

남동부의 오봉산(五峰山, 144m)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산지가 없다. 북서부를 흐르는 발안천(發安川)유역에 넓은 충적평야가 있고, 남부를 관류하는 관리천유역에도 평야지대가 있다. 평야지대가 전체 면적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주로 벼를 경작한다. 주요 농산물은 질좋은 쌀 외에 보리의 생산량이 많고, 잎담배를 재배한다. 하길리 참깨단지에서 생산된 참깨는 시를 대표하는 특산물이다. 원예도 활발하고 토끼·닭을 중심으로 축산업이 발달하였다. 과일류로 배·사과의 생산량이 특히 많다. 제조업으로는 대규모 제약단지에 들어선 수십개의 제약업체를 비롯하여 제지·견직·섬유 등 다양한 업체가 가동되고 있다.

교통은 39번 국도가 읍의 서부를 남에서 북쪽으로 향하고, 302번 지방도가 북부를 가로 지른다. 이밖에 5·13·28번 군도 등이 읍의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등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제암리에 3·1운동기념탑이 있다. 상두리에 광산김씨(光山金氏), 화리현리에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씨족마을이 있다.

행정(杏亭)·평(坪)·발안(發安)·제암(堤巖)·상신(上新)·장짐(長朕)·구문천(求文川)·하길(下吉)·화리현(禾里峴)·상두(上斗)·백토(白土)·길성(吉城)·요(料)·수직(水直)·갈천(葛川)·증거(增巨)·송곡(松谷)·동오(東梧)·관(官)·도리(桃李)·방축(防築) 등 21개 리가 있다.

  1. 동탄면(東灘面)

시의 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32.12㎢, 인구 3,219명(2015년 현재). 면소재지는 오산리이다. 본래 수원군 지역으로 옛 수원읍내의 동북쪽이므로 동북면이라 하여 야동·중촌·내곡 등 16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어탄면(漁灘面)을 병합하여 11개 리로 개편하고 동북과 어탄의 이름을 따서 동탄면이 되어 중리·목리 등 13개 리로 개편하였다. 1949년 화성군으로 편입되고, 1987년 금곡리 일부를 오산읍으로 편입시켰다.

지역의 대부분이 편마암으로 분포되어 있다. 북동부에 무봉산(舞鳳山, 216m), 남동부에 화성산(華城山, 171m), 남서부에 필봉산(筆峰山, 146m), 북서쪽 태안읍과 경계에 동학산 등 100∼200m의 봉우리가 면 전체를 에워싸고 있다. 중서부에 오산천(烏山川)이 남북으로 흐르고, 그 지류인 치동천(治東川)·신리천(新里川)이 동서를 가로 지르면서 주변유역에 띠모양의 충적평야를 이루고 있다. 남서부에 있는 산척(山尺)저수지가 관개용수를 공급한다.

전체 면적의 1/3정도가 농경지로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약간 우세한 곳이다. 주요 농산물은 미곡이외에도 콩 종류가 경작되고 약간의 호두·잣·은행 등이 생산된다. 기타 관광농업과 원예농업이 활발한 편이다. 제조업으로 화학·식료·합성섬유·제지·제약·유리·기계분야의 업체가 있으나, 면의 전 지역이 상수도보호구역과 수도권제한정비구역으로 설정되어 많은 제약이 따른다. 그러나 2001년 이후 대규모 주택 단지가 들어서면서 많은 환경 변화가 있게 되었다.

교통은 경부고속도로가 중서부를 남북으로 종단하면서 전 지역을 동서로 갈라 놓았다. 이와 함께 393번 지방도가 중서부를 종단하고, 302번 지방도가 면의 하단을 횡단한다. 이밖에 19·21번 군도 등 점차 도로망이 정비되는 추세이며, 인근에 경부선 철도역과 오산인터체인지가 있다. 문화유적은 중리의 무봉산에 만의사(萬儀寺)가 있다. 산척리에 함평모씨(咸平牟氏)의 씨족마을이 있다. 오산(梧山)·청계(淸溪)·반송(盤松)·석우(石隅)·영천(英川)·중(中)·신(新)·목(睦)·산척(山尺)·장지(長芝)·송(松)·방교(防橋)·금곡(金谷) 등 13개 리가 있다.

  1. 마도면(麻道面)

시의 서부 남양반도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31.74㎢, 인구 6,627명(2015년 현재). 면소재지는 석교리이다. 본래 남양군(南陽郡) 지역으로 마도면이라 하여 송치·쌍봉·상원 등 9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쌍수리면(雙守里面)을 병합하여 10개 리로 개편되었다. 1949년 화성군으로 편입되고, 1956년 면사무소를 석교리로 이전하였다.

지질은 화강암질편마암이 많이 분포해 있으며, 남서부의 청명산(淸明山, 155m)을 제외하고는 낮은 구릉과 평지가 대부분이다. 서해안과 인접한 북부 및 남부의 해안에는 해안간척지를 포함하여 비교적 넓은 해안평야가 있다.

마도면은 시 전체에서 인구수가 제일 적은 면이지만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비율은 제일 높은 곳이며, 밭농사에 비해 논농사가 다소 우세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 외에 보리의 수확량이 많은 편이다. 그리고 호두·잣·대추의 생산량도 많고, 특히 산나물 채취량이 시에서 제일 많다. 지역특산물로 버섯이 유명한데, 특히 표고버섯의 재배가 활발하다. 해안에 인접한 까닭에 일부 주민들이 농업에 종사하면서 어업을 같이하고 있다. 주민들은 남쪽과 북쪽의 해안지대에서 어류와 바지락·조개 등의 패류를 어획하며, 천연소금도 많이 생산한다. 가축은 한우·젖소·돼지·닭 등을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306번 지방도가 북단을 횡으로 통과하고 6·8번 군도가 종횡으로 면의 각지를 연결한다. 문화유적은 백곡리에 산성이 있다. 석교(石橋)·두곡(斗谷)·송정(松亭)·쌍송(雙松)·청원(靑園)·슬항(瑟項)·해문(海門)·백곡(白谷)·금당(錦堂)·고모(古毛) 등 10개 리가 있다.

  1. 매송면(梅松面)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27.45㎢, 인구 8,382명(2015년 현재). 면소재지는 어천리이다.

본래 수원군 지역이었으나 호매실의 이름을 따서 매곡면이라 하여 호매실·자목·도봉 등 10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광주군 송동면(松洞面)을 병합하여 9개 리로 개편하고 매곡과 동송의 이름을 따서 매송면이 되었다. 그 뒤 1949년 화성군에 편입되었고, 1956년 면사무소를 어천리로 옮겼다. 1987년 금곡리(金谷里)·호매실리(好梅實里)가 수원시 권선구로 편입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이 반상변정질편마암으로 되어 있으며, 중서부의 칠보산(七寶山, 239m)을 제외하고는 높은 산지가 없다. 서부의 반월천(半月川)유역과 남부에 충적평야가 있으며, 특히 북부에 송라(松羅)저수지와 남부에 어천(漁川)저수지 등이 있어 관개용수도 풍부한 편이다. 대부분이 평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넓은 평야가 분포하며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우세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과 밤·호두 등의 과일류가 생산되며, 주변 도시지역을 대상으로 한 원예농업이 활발한 편이다. 합성수지를 비롯한 몇몇 분야의 제조업체가 있으나, 시 전체에서는 드물게 면 전체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개발제한 규제가 많다.

안산시 반월공단과 수원시 권선구에 인접한 곳으로 각종 교통망이 발달해 있다. 새롭게 건설된 서해안고속도로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종단하고, 39번 국도가 면의 서부를 남북으로 잇는다. 306번 지방도가 면의 남단을 지나고 있으며, 이밖에 군도 등 각종 도로망이 잘 정리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원리에 명고서원지, 천천리에 매곡서원지(梅谷書院地)·오층석탑이 있다. 어천(漁川)·천천(泉川)·원평(院坪)·숙곡(肅谷)·야목(野牧)·송라(松羅)·원(院) 등 7개 리가 있다.

  1. 비봉면(飛鳳面)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38.54㎢, 인구 5,942명(2015년 현재). 면소재지는 양로리이다. 본래 남양군 지역으로 며지곶면이라 하여 대전·신남·존의 등 10개 이를 관할하다가 1895년 인천부 이포면의 포촌·유촌 등 15개 리가 되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저팔리면(楮八里面)의 자양·신안 등 5개 리를 병합하여, 비봉산의 이름을 따서 비봉면이 된 뒤 9개 리를 관할하였다. 1949년 화성군으로 편입되고, 1983년 상기리(上箕里)가 봉담면으로 행정관할권이 넘어갔다.

대부분의 지역이 주로 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북부 일부지역에는 충적층이 발달해 있다. 산지로는 북서쪽 남양면과의 경계에 해망산(海望山), 남동부에 태행산(太行山, 293m)이 있다. 이밖에 낮은 구릉지를 제외하고는 북단의 남전천(南田川) 유역을 비롯하여 충적평야가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중심을 이루는 지역으로 주요 농산물은 쌀 외에 보리·조 등이 생산되며, 과일류로 참외와 배의 생산량이 많다. 특히 이 지역에서 다량 생산되는 ‘비봉참외’는 당분이 많고 껍질이 얇아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이외에 농가부업으로 돼지 사육을 중심으로 낙농업이 운영되고 있다.

자안리에 고령토를 다량 생산하는 광산이 있다. 섬유제품을 생산하는 업체가 일부 있으나, 거의 전지역이 개발제한구역에 묶여있어 제조업을 비롯하여 공업발전은 미진하다. 교통은 서해안고속도로가 남북을 길게 통과하고 39번 국도가 면의 중앙을 지난다. 306번 지방도가 동서를 가로 지르면서 39번 국도와 중앙에서 교차하는 등 비교적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남전리에 남이장군묘가 있다. 양로(兩老)·남전(南田)·유포(柳浦)·삼화(三花)·구포(鳩浦)·쌍학(雙鶴)·청료(靑蓼)·자안(紫安) 등 8개 리가 있다.

  1. 서신면(西新面)

시의 서부, 남양반도의 남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43.23㎢, 인구 7,039명(2015년 현재). 면소재지는 매화리이다. 본래 남양군 지역으로 신리면이라 하여 홍법·사곶·용두 등 7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서여제면(西如堤面)을 병합하여 13개 리로 개편되고, 서여제와 신리의 이름을 따서 서신면이 되었다. 1949년 화성군으로 편입, 1987년 칠곡리(漆谷里)가 송산면(松山面)에 편입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이 화강암질편마암이며, 중북부에 함경산(咸鏡山, 137m)·봉화산(烽火山, 170m), 동쪽 마도면과의 경계에 청명산, 남부에 해운산(海雲山, 145m) 등 산지가 면 전체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평야지대는 해안평야를 비롯하여 주로 남서부에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다. 경작율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다소 우세하다.

주요 농산물로 쌀 이외에 버섯·산나물을 비롯하여 참외가 많이 산출되며, 그중에 버섯은 영양가 높고 맛좋은 표고버섯의 비중이 높다. 특히 제부도에서 생산되는 땅콩은 무공해 식품으로 유명하며 농가의 주 소득원이다. 해안에 인접하여 어업과 천일제염업이 활발히 행해지며 특히, 제부도를 포함한 해안지대에 농사와 어업을 겸하는 주민들이 많다. 이들은 각종 어류와 패류를 어획하며, 굴 양식에도 많이 종사한다.

교통은 309번 지방도가 남북으로 달리면서 면의 중앙에서 336번 지방도와 교차한다. 이밖에 제부도까지 연결되는 2번 군도와 25번 군도 등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상안리에 당성(唐城)과 신흥사·안곡서원, 궁평리에 정용채 가옥과 박희석 가옥, 홍법리에 홍법사가 있다. 매화(梅花)·전곡(前谷)·상안(尙安)·광평(廣坪)·장외(墻外)·송교(松橋)·제부(濟扶)·홍법(弘法)·사곶(仕串)·용두(龍頭)·궁평(宮坪)·백미(百味) 등 12개 리가 있다.

  1. 송산면(松山面)

시의 북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53.99㎢, 인구 1만 1245명(2015년 현재). 면소재지는 삼존리이다. 본래 남양군 지역으로 송산면이라 하였고 고잔·포막·중송 등 8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수산면(水山面)·세곶면(細串面) 등 3개 면을 합쳐 13개 리로 개편하고, 송산면이 되었다. 1949년 화성군으로 편입되고, 1987년서신면(西新面) 칠곡리를 편입되었다. 형도(衡島)·어도(漁島)·우음도(牛音島) 등 3개의 유인도와 18개의 무인도가 있다.

북동쪽 해안에 충적층이 발달해 있고, 면의 대부분 지역이 화강암질편마암으로 곳곳에 구릉성 산지가 산재하는데 북부에 천등산(天燈山, 146m), 남동부에 응봉산(鷹峰山, 109m), 남서부에 와룡산(臥龍山, 108m)·봉산(峰山, 106m) 등이 있다. 남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지역이지만, 해안평야를 비롯하여 넓은 충적평야가 분포해 있는 관계로 경작면적이 많다.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우세한 지역으로 주요 농산물은 쌀 외에 잡곡·두류가 많이 난다. 특용작물로 인삼·참깨·고추를 비롯하여 버섯·호두·잣 등의 수확이 많고, 약초의 생산량도 시에서 제일 많다. 가축은 한우·젖소가 사육된다. 남양반도의 중심지역에 해당하며 대부분의 마을이 바다에 접해있어 어업 활동이 활발하다.

특산물로는 남양소금이 유명한데, 이는 광복 이후 삼존리와 용포리 일대에 새롭게 조성된 염전에서 생산되며 전국에 널리 알려진 특산물이다. 어류의 홍어·숭어 등이 인근 해안지역에서 많이 잡히며, 특히 지화리 마산포 일대에서 나는 남양석굴은 예로부터 임금의 수라상에 오를 정도로 유명했다. 중심에 위치한 사강장은 면의 유일한 정기시장으로 다양한 산물이 거래된다.

교통은 306번 지방도가 서부에서 동부 방향으로 횡단하며, 309번 지방도가 남단에서 북쪽으로 종단하면서 양 지방도가 면의 남동부에서 교차한다. 이밖에 4·25번 군도 등 도로망이 점차 정비되고 있다.

문화유적은 육일리의 성지, 지화리 와룡산에 화량성지(花梁城址)가 있다. 사강(沙江)·봉가(鳳歌)·삼존(三尊)·용포(龍浦)·고정(古井)·쌍정(雙井)·천등(天燈)·신천(新天)·독지(禿旨)·마산(馬山)·지화(芝花)·중송(中松)·육일(六一)·고포(古浦)·칠곡(漆谷) 등 15개 리가 있다.

  1. 양감면(楊甘面)

시의 중앙 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31.07㎢, 인구 4,266명(2015년 현재). 면소재지는 신왕리이다. 본래 수원군 양감면 지역으로 용소·고려·소소 등 12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감미면(甘味面) 일원과 상홀면(床笏面)·토진면(土津面) 각각의 일부, 진위군 율북면(栗北面) 진목리(眞木里)를 병합하여 10개 리로 개편하고 양간과 감미의 이름을 따서 양감면이 되었다. 1949년 화성군으로 편입되고, 1987년 고념리(古念里)가 평택군에 이관되었다.

동부에는 편마암이, 서부에는 편암이 분포한다. 동남부와 중앙의 일부 산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역이 고도 100m 이하의 구릉지대이다. 면의 남동부는 진위천 유역과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류하는 관리천(官里川)유역에 평야지대가 조성되었다. 낮은 구릉지와 함께 충적평야와 침식평야가 고루 분포한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아 농업중심지역이며, 주요 농산물은 쌀과 보리·콩 등의 잡곡이 많이 재배되며, 이외에 호두·잣·대추 등이 산출된다.

특히 잎담배의 생산량은 시 전체에서 제일 많다. 송산리 일대에서는 건강식품인 영지가 지역 특산물로 다량 재배되며, 이밖에 풍부한 농업용수를 이용한 시설원예 재배가 성황을 이룬다. 목초지가 산재하여 한우·젖소·돼지·닭 등을 사육하는 낙농의 최적지이다. 수도권 개발유도지역이자 서해안 개발지역권으로 육성되고 있으며 수십개의 중소기업체가 있다.

교통은 39번 국도가 면의 남서부를 남북으로 종단하고, 5·9·11번 군도와 기타도로가 중앙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있으나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정문리에 느티나무가 있고 사창리에 광산김씨(光山金氏), 대양리에 함평이씨(咸平李氏)의 씨족마을이 있다. 신왕(新旺)·사창(社倉)·정문(旌門)·송산(松山)·용소(龍沼)·요당(蓼塘)·대양(大陽) 등 7개 리가 있다.

  1. 장안면(長安面)

시의 남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67.71㎢, 인구 1만 940명(2015년 현재). 면소재지는 어은리이다. 본래 수원부 지역으로 말을 먹이는 지방이므로 수방 또는 화방면이라 하여 일·이·삼 등 6개 리를 관할하다가 1895년 남양군에 편입되어 장안면으로 개칭되고, 그 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수원군 초장면(草長面)과 우정면(雨井面) 오동(五洞)의 일부를 통합하여 10개 리로 개편하고, 장안면이 되었다. 1949년 화성군으로 편입되었다.

남부는 남양호와 접해 있는 해안지역으로 퇴적층이 형성되어 있다. 동부는 편암이, 서부는 화강암질편마암이 분포되어 있다. 산지로 북동쪽에 꽃당산(105m), 서쪽에 봉화산, 중앙부에 소남산(小南山, 107m)이 솟아있다. 동부를 관류하는 어은천(漁隱川)과 남양호로 흘러드는 남부의 하천유역에 넓은 충적평야가 있다. 경지면적이 다른 읍·면보다 훨씬 넓은 지역이고, 논농사가 밭농사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형적인 농업중심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 외에 보리·콩 등이고 배추·무 등 채소류 재배가 활발하다. 특히 대추·잣 등의 생산량이 많다. 특히 잎담배의 생산량이 많으며, 한우·젖소를 중심으로 한 농가가 집중된 축산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남부 해안지역에서는 천일제염이 제조된다.

금의공단(錦衣工團)에는 각종 제조업체가 있고, 특히 석포리 일대에는 자동차공장이 있다. 교통은 332번 지방도가 면의 북단을, 302번 지방도가 중북부를 횡단하고, 321번 지방도가 면의 남서부에서 중앙을 지나 동쪽으로 이어진다. 이밖에 여러 방향의 군도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어은(漁隱)·석포(石浦)·수촌(水村)·독정(篤亭)·장안(長安)·덕다(德多)·사랑(沙浪)·금의(錦衣)·사곡(沙谷)·노진(蘆眞) 등 10개 리가 있다.

  1. 정남면(正南面)

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40.67㎢, 인구 1만 2509명(2015년 현재). 면소재지는 발산리이다. 본래 수원군 지역이었는데, 이 면은 수원부에서 남쪽이 되므로 남곡면이라 하여 괘낭·갈천·모산 등 22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정림면(正林面)와 문시면(文市面) 일부를 병합하여 19개 리를 관할하고, 정림과 남곡의 이름을 따서 정남면이 되었다. 1949년 화성군으로 편입되었다.

지역의 대부분은 편마암으로 이루어졌다. 북서부에 태봉산(236m), 서부에 서봉산, 동쪽 오산시와의 경계에 노적봉(露積峰, 160m) 등의 산자락이 면의 안쪽을 향하고 있다. 중앙부에 황구지천(黃口池川)이 면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흐르고, 북단에 관개시설로 보통(普通)저수지가 있다. 전체면적에 비해 경지면적이 매우 넓으며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약간 우세한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잡곡 이외에 감자의 생산량이 두드러지며, 배추·무 등의 채소류 생산과 함께 원예농업도 활발하다. 과일류로 사과와 질 좋은 배 산지로 유명한데, 사질양토에서 재배되어 껍질이 연하고 당도가 높아 인기가 높으며, 밤·호두·잣·은행 등 종실류 재배와, 양봉과 잠업도 활발하다. 특히, 한우·젖소·닭 등을 사육하는 대단위 목장과 여러개의 중소목장이 산재해 있는 낙농지역이다. 약품·화학·합성수지·전자·금속 등 다양한 제조업체가 위치하여 비교적 공업이 발달해 있다. 오산시와 경계를 이루며 수원시와도 가까운 지리적인 조건을 갖고 있다.

교통은 330·343번 지방도가 면의 여러 방향을 연결하고, 이밖에 9·17·26번 군도 등 인근지역으로 연결되는 다양한 도로망이 발달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문학리에 홍승인 고가·오층석탑, 석종형(石鐘形) 부도, 관항리에 삼층석탑이 있다.

발산(鉢山)·보통(普通)·관항(官項)·오일(五逸)·백(栢)·문학(文學0}})·신(新)·계향(桂香)·귀래(歸來)·제기(諸岐)·덕절(德節)·음양(陰陽)·망월(望月)·수면(水面)·내(內)·금복(錦福)·고지(古支)·용수(龍水)·괘낭(掛囊) 등 19개 리가 있다.

  1. 팔탄면(八灘面)

시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50.95㎢, 인구 1만 424명(2015년 현재). 면소재지는 구장리이다. 본래 수원군 지역으로 발안 또는 팔탄의 이름을 따서 팔탄면이라 하였고 안산·상사천·독곡 등 15개 이를 관할하다가 1895년 남양군에 편입되었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공향면(貢鄕面)의 10개 리와 남양군 저팔리면(楮八里面) 일부를 합쳐, 16개 리로 개편이 되고 그 이름도 팔탄면이 되었다. 1949년 화성군으로 편입되고, 1987년 지월리의 일부를 향남면에 편입시켰다.

북부지역에는 반상변정질편마암이 분포하며, 남부는 화강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 봉담읍과의 경계에 철마산을 제외하고는 산지의 대부분이 중앙에서 남쪽으로 솟아있다. 중앙의 오두산(烏頭山, 141m)을 비롯하여 남부 방향으로 천덕산(天德山, 133m)·꽃당산·신무산(申戊山, 104m) 등이 있다. 평야지대는 주로 서부에 집중되어 있고, 경지율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논농사가 밭농사에 비해 우세하다. 특히, 많은 저수지가 있기 때문에 가뭄을 타지 않는 곡창지대이다.

주요 농산물인 쌀 외에 보리·콩의 생산량이 많고 참깨 재배량도 적지 않다. 녹비·퇴비원료·사료 등 농축업에 필요한 자재의 생산량이 군 전체에서 제1위를 차지하고, 과일류로는 구릉지 일대에서 산출되는 감이 있다. 지역 특산물로 기천리 일대에서 재배되는 느타리버섯이 유명하다. 축산업으로 돼지·닭이 주로 사육되며, 특히 양계업이 활발한 편이다. 제조업으로 벽돌 및 완구공업을 중심으로 여러 업체가 들어서 있다.

교통은 서해안고속도로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고, 39번 국도가 남동부에서 북단으로 향한다. 이 밖에 317번 지방도가 동쪽에서 북서 방향으로 이어지며, 여러 군도가 면의 교통편으로 활용된다. 문화유적은 기천리에 사나사지(舍那寺址), 율암리에 선사 유적지 등이 있다. 구장(舊場)·하저(下楮)·창곡(昌谷)·기천(箕川)·가재(佳才)·율암(栗巖)·노하(路下)·덕천(德泉)·지월(芝月)·덕우(德右)·서근(西斤)·월문(月門)·화당(花塘)·고주(古洲)·매곡(梅谷)·해창(海倉) 등 16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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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집』(경기도, 1987)
『한국행정제도사』(정시채, 법문사, 1986)
『경기도지』(경기도지편찬위원회, 1955·1956·1957)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
화성시(www.hscit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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