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봉건의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반외세의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동학농민군은 1894년 3월 29일 백산 봉기 이후 자발적으로 관아를 습격해 관속을 응징하였다. 4월 6일∼7일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官軍)을 철저히 참패시킴으로써 불과 한 달 만에 호남일대를 휩쓸었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고 그에게 군사 800명을 파견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영광에 머물고 있는 초토사(招討使)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이 함평에서 나주·장성 등지로 향했다는 함평현감 권풍식의 보고에 따라 4월 22일 대관(隊官) 이학승·원세록·오건영에 병정 300명을 주어 장성으로 출발시켰다.
이튿날 23일(양 5월 27일)에는 황룡촌에 유진(留陣)하고 있는 동학농민군을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함평에서 장성으로 진격한 동학농민군은 때마침 월평리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관군으로부터 기습적인 포격을 받아 40∼50명이 희생되면서 진중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망을 보고 있던 농민군은 경군(京軍)의 숫자가 농민군에 비해 열세임을 확인하고 동학농민군은 오히려 역습을 가하였다. 양쪽 진영의 거리가 가까워 포격전이 불리한 여건인데다 죽음을 각오하고 육박해오는 동학농민군의 돌격에 신식훈련을 받았다는 경군(京軍)도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계훈의 경군은 신식훈련을 받은 병정들이요, 또 신무기로 무장한 정예부대이었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오는 동학농민군에게 쫓겨 영광방면으로 도망하다가 5리쯤 나가서 신호리 마을 뒤 구릉(丘陵)에 이르렀다. 이때 대관 이학승은 후미에서 동학군과 최후로 항전했으나 전사하고 중요한 무기를 빼앗기고 말았으니 경군의 위세는 땅에 떨어지고 병정은 사기를 잃었다.
뿐만 아니라 도망가는 관군을 30리 지경까지 추격해 ‘구르프포’ 1문과 ‘회선포’ 1문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또 대관 이학승 이외에 병정 5명이 전사하였다. 동학군은 진중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대(竹)로 만든 ‘장태’ 수십 대를 산의 정상으로부터 내려 굴리며 사격을 가함으로 관군은 미처 정신을 수습할 사이도 없이 시살(廝殺)을 당해 이효승·배윤환 2명과 관병 100명을 몰사시키고 대포 2문, ‘구르프포’·‘회선기관포’ 각 1문과 양총(洋銃) 100여 개를 빼앗았다.
‘대장태’라 하는 것은 청죽(靑竹)으로 얽어 닭장 같이 만든 것으로 그 밑에 차바퀴를 붙인 것이다. 그 속에는 군사가 앉아 총질을 하는 것으로, 이 장태를 만든 사람은 장흥접주였던 이방언이었으므로 그 별호를 이장태라고 불렀다. 동학농민군들은 이 장성싸움에서 얻은 대포와 양총을 거두고 북상해 정읍·태인을 거쳐 이 전투 이후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한편 이학승과 병정 5명에 대한 장례는 장성 향리 박전성이 사재 500량을 들여 장례를 치렀다가 전주화약 후 5월 9일 서울로 다시 운구되었다. 후일 이학승은 좌승지로 추증되고 전사지인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에는 1897년 최익현이 지은 ‘증좌승지이공학승순의비(贈左承旨李公學承殉義碑)’가 세워졌다. 1997년 장성군은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 등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