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천(永川). 진주목사 황안(皇安)의 아들이며, 평장사 안우(安祐)의 사위이다.
안우 휘하에서 여러 차례의 무공으로 별장이 제수된 뒤 공부시랑에 이르렀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군무(軍務)에 밝으므로 종부령(宗簿令)에 임명되었으며,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1363년(공민왕 12) 1등공신에 녹공(錄功)되었다. 1374년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가 되어 판삼사사(判三司事) 최영(崔瑩)의 휘하에서 제주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평정하였다.
1380년(우왕 6)에는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전라도병마사가 되었다. 1382년 밀직부사로서 영해군(寧海郡)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으며, 다음해 8월에도 왜구가 거령(居寧)·장수현(長水縣) 등을 함락시키고 전주를 침략하자 부원수로서 여현(礪峴)에서 물리쳤다.
1385년 정월 안동원수(安東元帥)로서 적을 무찌르고, 1388년 4월 요동정벌(遼東征伐) 때는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종군하여 위화도회군에 가담, 1390년(공양왕 2) 4월 회군1등공신에 포록(褒錄)되었다.
1388년(창왕 1) 7월에는 왜적들이 광주(光州)를 함락시키니 양광경상전라도도체찰사(楊廣慶尙全羅道都體察使)가 되어 남원에서 왜구를 무찔렀다.
1389년 6월 밀직사로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390년 서북면도절제사 평양윤(西北面都節制使平壞尹)에 제수되고 다음해 전라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조선이 개국된 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오른 뒤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