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전통적 규범 속에서 효(孝)는 백 가지 행동과 만 가지 덕(德)의 근본이라 하여 가장 높은 덕목이었다. 공자(孔子)와 증삼(曾參)의 문답에서 효도에 관한 것들을 추려놓은 ≪효경≫에서는 “무릇 효가 덕의 근본이며, 모든 가르침은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발부(身體髮膚)를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고, 스스로 입신(立身)하고 진리를 실천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김으로써 부모를 영광되게 하는 것이 효도의 끝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고 몸을 편안히 돌보아드리며 몸가짐을 단정히 하여 보존하고 입신출세하여 가문을 빛내는 것이 효행의 길이었다.
부계의 가계존속을 중시하던 우리의 전통적 가족에서는 부자관계가 중심이었으므로 ‘효’는 가장과 집을 계승할 아들의 관계를 지지하는 규범이었다. 그러나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는 속담이 말해주듯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자연적인 것이며, ‘효’를 부모의 자애로운 사랑에 대한 보은(報恩)이라 할 때 효도하는 데에 아들과 딸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가계계승자인 아들의 효도가 의무적인 복종과 봉사라고 한다면 출가외인의 처지에 있는 딸의 효도는 부모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보답이라고 할 수 있다. 딸의 경우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다 바위가 되어버린 이야기라든가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깊은 산속에 들어가 약초 캐다 죽어 선녀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 등에서처럼 아들과 달리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더욱 간절하고 처절한 것이었다.
어버이를 극진히 섬긴 효녀의 예는 ≪삼국사기≫에 전하는 『효녀지은 孝女知恩』과 『설씨녀 薛氏女』, ≪삼국유사≫에 전하는 『빈녀양모 貧女養母』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 중에서 『효녀지은』의 이야기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지은은 신라의 한기부(韓祇部) 사람 연권(連權)의 딸인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며 나이 32세가 되어도 오히려 시집을 가지 않고 밤낮으로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잘 봉양할 수 없게 되자, 남의 일도 해주고 혹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 어머니에게 드렸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곤궁함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는 부호의 집에 몸을 팔아 종이 되고 쌀 10여 석을 얻기로 하였다.
그 뒤 지은은 그 집에서 종일토록 일을 하여주고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와서 밥을 지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이와 같이 사나흘이 지나자, 어머니는 딸에게 말하기를 “지난날에는 먹는 것이 맛나더니 오늘에는 밥은 비록 좋으나 맛은 좋은 것 같지 않고 간장을 칼로 찌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어찌된 까닭인가?” 하므로, 지은이 사실대로 알리자 어머니는 “나 때문에 네가 남의 종이 되는 것은 차라리 내가 빨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소리를 내어 크게 통곡하니, 딸도 또한 통곡하여 길가는 사람들도 슬픔을 느끼게 하였다.
이때 효종랑(孝宗郎)이 나와 놀다가 이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부모에게 청하여 집에 있는 조 100섬과 의복을 보내주고, 또 효녀 지은을 산 주인에게 곡물을 변상하여 양민으로 되게 하니, 이를 본 낭도(郎徒) 몇천 명도 각각 조 1섬씩을 거두어 보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벼 500섬과 집 한 채를 하사하고, 정역(正役)의 의무를 면제시켰다.
또 곡물이 많아서 나쁜 도적들이 있을까 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군사를 보내어 당번으로 지키게 하고, 그 마을에 표방(標榜)하기를 ‘효양방(孝養坊)’이라 하였다. 이어서 미담을 적어 당(唐)의 왕실에 보냈다. 효종랑은 당시 제3재상(宰相)인 서발한(舒發翰) 인경(仁慶)의 아들로 어릴 때 이름을 화달(化達)이라 하였는데, 진성여왕은 그가 비록 어리나 노성(老成)하게 보인다고 말하고 곧 형인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 밖에도 우리 역사상에는 많은 효녀가 있었는데, 이들의 효행은 조선시대 편찬된 ≪오륜행실도≫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및 각 군현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고전문학의 백미로 손꼽히는 『심청전』의 주인공 심청은 우리 나라 효녀의 대명사로 일컬어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