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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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개념
경전의 자구(字句)에 관해 그 해석을 주로 하는 학문.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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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전의 자구(字句)에 관해 그 해석을 주로 하는 학문. 유학.
내용

‘훈(訓)’이라 함은 자구나 언어가 가리키는 의의를 설명한다는 것이 되고, ‘고(誥)’는 고언(古言)이란 회의(會意) 글자로서 그것은 바로 고어(古語)를 현재의 언어 문자로 바꾸어 풀이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훈고(訓誥)를 ‘훈고(訓故)’라고도 표기한다.

훈고학은 중국 고전의 해석상 무엇보다 기본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훈고가 고대로부터 구송(口誦)으로 전승되어 온 것을 문헌으로 기록하여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을 보게 된 시기는 한대(漢代)이다. 그러므로 송(宋)·명(明)의 의리(義理)에 관한 학문과 대칭하여 일반적으로 한(漢)·당(唐) 제유(諸儒)들의 경학(經學)을 가리켜 훈고학이라 부르고 있다.

진시황의 분서(焚書) 20년 후 한(漢)나라 혜제(惠帝) 4년 협서(挾書)의 금(禁)을 해제하여 천하의 유서(遺書)를 모으고, 진(秦)나라의 박사(博士)를 초치하여 고서의 정리와 경전의 훈고 주석에 종사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유교 경전의 훈고를 충실하게 담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경 박사(五經博士)를 두고 그들에게 각각 일 경(一經) 일 박사(一博士)라고 하는 전문성을 지닐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다른 경(經)을 아울러 전공하지 않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또한, 그 경 하나에 관하여서도 달리 몇 개의 유파가 나타나 전문성을 더욱 심화시키고, 엄격 분명한 사법(師法)의 전수가 이루어졌다.

≪시경≫은 신배공(申培公)·원고생(轅固生)·한영(韓嬰)·모형(毛亨), ≪서경≫은 구양생(歐陽生)·하후승(夏侯勝)·하후건(夏侯建), ≪주역≫은 시수(施讎)·맹희(孟喜)·양구하(梁丘賀)·경방(京房)·비직(費直), ≪춘추≫는 공양(公羊)·곡량(穀梁) 등이 배출되어 제각기 그 전문 주석에 힘써 많은 공적을 남겼다.

한편, 후한(後漢)의 훈고학자들은 그 대부분이 줄곧 유흠(劉歆)의 계통을 잇고 있다. ≪주례≫에 관해 유흠은 이를 두자춘(杜子春)에게 전하고 두자춘은 이를 다시 정흥(鄭興)·정중(鄭衆) 부자에게 전하였다. ≪좌전≫ 역시 유흠의 뒤를 이어 가규(賈逵)·복건(服虔) 등이 그 주석자로 가장 저명하였다.

≪공양전 公羊傳≫에 관하여는 하휴(何休)가 ≪좌전≫과 ≪곡량전≫의 두 전(傳)을 함께 물리치고 오로지 공양해고(公羊解誥)에만 힘을 기울여 권위를 세웠다. 그 밖에 ≪논어≫에는 포함(包咸)·하휴·정중의 주해서가 있고, ≪맹자≫에는 조기(趙岐)의 주해서가 있다. 그리고 허신(許愼)의 ≪설문해자 說文解字≫ 14편(篇)은 ≪이아 爾雅≫와 함께 훈고학자들에게 소중한 보전(寶典)이었다.

마융(馬融)과 정현(鄭玄)에 이르러 한 사람이 여러 가지 경과 전을 함께 다루는 움직임으로 발전하고, 이에 제가(諸家)의 훈고가 비로소 정리, 집성을 보게 되었다. 계속하여 위(魏)·진(晉) 사이에는 왕숙(王肅)·왕필(王弼)·하안(何晏)·두예(杜預)·범녕(范寧) 등의 주석가가 나왔다.

당대(唐代)의 안사고(顔師古)가 태종의 명에 의해 오경의 탈오(脫誤)를 보정(補正)하고, 공영달(孔潁達)이 제유 공저로 ≪오경정의 五經正義≫를 지어 크게 도움을 주었다. 이 모두가 거의 전통적 훈고를 중심으로 하는 학문이었다. 송대에 와서 의리를 주로 하는 경학이 일어나 훈고만을 주로 하는 경학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훈고를 전혀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경서에 나타난 형이상학적 해석을 그 위에 가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주자(朱子)도 일찍이 학자가 경을 대함에 있어서 그 글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능히 그 의(意)에 통하는 자가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오히려 훈고를 존숭하였다.

청조(淸朝)의 경학은 그 특징이 바로 송·명의 공소 이론(空疏理論)을 반대한 점에 있다. 고증학의 발달로 경전에 관한 이제까지의 전통적 해석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방법의 고대어 주석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철저한 고증에 의해 우선 경의(經義)를 밝히고 문자와 그 뜻을 분명하게 가려낼 것을 요구하는 훈고학파가 여기에 대두하였다.

그리고 문자는 언어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으므로 먼저 언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문자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보는 음운학파(音韻學派)가 나타났으며, ≪설문≫을 비롯하여 한대 이후의 학서(學書)가 모두 미흡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금석학파(金石學派)가 일어났다.

또한, 우리에게 현재 전해진 경서가 수없이 탈오, 착간(錯簡)되어 믿을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하여 교감파(校勘派)와 집일파(輯佚派)가 나왔다. 한편, 경전 연구 방법으로 훈고와 교감 두 가지를 크게 나누어 취할 수 있었다. 혜동일파(惠棟一派)의 한학은 훈고를 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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