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요풍의 노래로서 국악의 생활화와 대중화라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와 연관되어 1980년대에 부상한 새로운 국악 갈래이다. 「어디로 갈꺼나」, 「한네의 이별」, 「삼포가는 길」, 「꽃분네야」, 「산도깨비」 등이 국악가요에 속한다.
국악가요의 연원은 일제강점기 민요풍의 대중가요였던 신민요에서 찾아진다. 당시 신민요는 특정 작곡, 작사자에 의해 짧은 유절 형식의 민요풍 가요로 만들어져 양·국악 혼합합주(일명 鮮洋合奏)에 의해 반주되면서 대중들에게 현대적인 민요로 유행되었다. 국악가요는 1970년대 후반 국악계 안팎에서 소규모 양·국악 혼성 실내악단에 의해 반주되는 민요풍의 창작가요로서 1980년대에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는 퓨전국악의 대중화로 인하여 그 하위 갈래로서 민요의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자리잡았으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쇠퇴일로에 있다.
국악가요의 원천에 해당하는 민요풍의 창작가요는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주류 장르 중 하나였던 신민요에서 시작한다. 〈노들강변〉, 〈처녀총각〉, 〈조선팔경가〉 등 민요양식과 유행가 양식이 혼합된 노래들이 1930년대에 크게 유행하여 신민요라는 갈래가 당시 성행하였다. 그러나 해방이후 창작민요는 전문 국악인들의 창작 및 가창 전승을 통해 기존의 통속민요와 함께 전문 국악인의 레퍼토리로 편입되었고 민요양식과 결별한 한국대중가요는 미국식 대중음악어법에 점점 더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70년대 들어 국악계와 대중음악계, 그리고 민중가요 진영 사이의 교차적 틈새 영역에서 국악가요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김영동은 국악가요를 연 초기 작곡가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1978년 12월 국립극장에서 발표된 〈누나의 얼굴〉, 〈개구리 소리〉 등은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민족문화운동 혹은 민중가요의 영향을 받은 노래로서 민요풍의 운동가요로 유행되었고 영화주제가 〈조각배〉,〈어디로 갈꺼나〉, 연극 삽입가요 〈사랑가〉, 〈한네의 이별〉, TV주제가 〈삼포 가는길〉 등은 국악가요의 대중성을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영동의 작업을 이어받아 국악가요가 국악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정착하게 된 데에는 국악실내악단 ‘슬기둥’ 활동의 힘이 컸다. 가야금, 피리, 기타, 해금, 소금, 신디사이저 등 당시 새로운 양·국악 혼성 편성으로 구성된 국악실내악단 슬기둥은 1990년대 초반까지 김영동, 채치성, 조광재 등의 창작곡을 연주하면서 방송프로그램 출연과 음반작업, 라이브 공연을 통해 국악계에 ‘국악의 대중화’, 혹은 ‘생활화’라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슬기둥의 대표곡으로는 〈꽃분네야〉, 〈산도깨비〉,〈소금장수〉, 〈황톳길〉 등이 있다.
초창기 국악가요는 대편성 기악음악위주의 창작국악과 달리 짧고 단순하여 따라 부르기 쉬운 동요나 민요풍 노래 위주로 되어 있고 대금, 가야금 등의 전통선율악기와 기타 및 신서사이저의 서양화성악기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밴드의 반주를 포함하였다. 국악가요의 이러한 반주 편성은 이후 퓨전국악 밴드의 모체가 되었다. 국악가요는 음악회장외에 방송 및 음반과 같은 대중매체에 대한 친화력이 강하고 주요 수용층을 젊은이로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당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국악가요가 대중화되면서 국악관현악단에서 국악가요 공연을 주최하는 등 국악계 제도권에 진입하여 대편성 국악관현악단에서도 국악가요를 수용하였다.
국악가요는 그간 소수 매니어 혹은 노년층에 제한된 국악의 수용층을 넓히고 국악의 활로를 방송 및 음반, 청소년 음악회 등으로 새롭게 넓히는 등 국악의 대중화 및 현대화라는 1980년대의 시대적 과제에 충실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단조·장조 오음음계의 틀에 박힌 선율과 초보적인 3화음, 유절형식의 서정가요라는 초기의 정형화 된 틀에서 진화하지 못하고 가사에 있어서도 토속적이고 의고적·감상적인 이미지를 고착화시킴으로써 이후 시대 변화에 맞추어 자생적으로 변신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