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해방이후 소련 점령군과 함께 입북하여 북한군과 정계에서 활동한 소련계 한인.
개설
설립목적
연원 및 변천
1946년 초 철도보안대를 창설할 때 소련파들이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북조선 임시위원회 위원장인 김일성은 철도경비를 위해서 추가적인 병력이 필요함을 소련 군정 당국과 협의하여 각 도에 단위별로 철도보안대를 창설해 나갔다. 이때 소련파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창설 작업이 급진전되었다.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 창설시 학교 편성 때에도 소련파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학교장 아래 군사 및 정치 부교장 그리고 전술, 포병, 사격, 통신의 4개 학부가 설치되었고, 4개 학부의 학부장에서 모두 소련파 출신들로 채워졌다. 그리하여 소련파들의 이러한 활동이 기반이 되어 제2차 당 대회에서는 북한정부를 수립할 때 소련파들은 빨치산파, 연안파, 국내파 등과 함께 연합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기능과 역할
허가이와 김일성간의 갈등은 1950년 말 조선 노동당 중앙 위원회 제3차 전원 회의에서 비롯되었는데,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매우 강경한 어조로 연설했다. 그는 전쟁을 통하여 충성스런 당원과 그렇지 못한 당원이 드러났다고 주장하였고, 당내 위치에 관계없이 충성스럽지 못한 당원들을 엄단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김일성은 이 사업이 적절한 법절차에 따라 진행되어야 하고 무차별적인 처벌을 자제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 사업은 허가이가 주도하는 검열 위원회의 임무였는데, 1950년 12월부터 중앙 위원회 제4차 전원 회의가 열린 1951년 11월 1일까지 거의 1년 동안 허가이는 김일성의 지시를 어기고 하위 당원에 대한 무차별 출당 처분을 단행해 버렸다. 김일성은 축출당한 사람들을 복당시키도록 명령하였으며, 이때 축출당한 당원들은 1952년 12월 15일의 중앙 위원회 제5차 전원 회의 때까지 전체 당원의 69.2%가 복권되었으며, 더 많은 당원들이 모집되었다.
현황
이후 1956년 8월 회의에서 소련파 박창옥이 연안파인 최창익 등과 함께 연립지도체제의 수립을 명분화하여 공개적으로 반김일성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러한 움직임은 김일성을 비롯한 빨치산파의 즉각적인 반발을 피할 수가 없었다. 김일성과 빨치산파들은 즉각 대대적인 역공을 퍼부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지금까지 정계에 남아있던 소련파 인사들과 연안파들이 모두 숙청되었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한국전쟁과 노동당전략』(김점곤, 박영사, 1983)
- 『남노당 연구』(김남식, 돌베게, 1984)
- 『북한인민군대사』(장준익, 서문당, 1991)
- 『조선노동당연구』(이종석, 역사비평사, 1995)
- 『북한의 당, 국가기구, 군대』(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 한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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