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근대화론 ( )

근대사
개념
현대 한국의 경제적 · 정치적 성장의 원동력을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찾는 역사적 관점.
정의
현대 한국의 경제적 · 정치적 성장의 원동력을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찾는 역사적 관점.
개설

일제강점기를 해석하는 국내 역사학계의 관점은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크게 갈린다. 내재적으로 발전하고 있던 조선사회가 일제에 의해 수탈당함으로써 발전을 방해받았다는 것이 종전 역사학계의 ‘내재적 발전론’(수탈론)이라면,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해 경제가 성장하고 근대화의 토대가 마련된 점을 인정하자는 것이 안병직, 이영훈 등 낙성대연구소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해방 후 한국 역사학은 일제 시기부터 계속되어온 식민사관과 실증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학자들에게는 식민사관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이것은 1960년대 이후 김용섭을 비롯한 일군의 역사학자들이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 연구를 내놓으면서 가능해졌다. 내재적 발전론이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세계사적 발전 법칙을 따라 설명함으로써 정체성론, 타율성론 등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데 기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내재적 발전론은 한국 근대사연구의 주류가 되어갔다. 일제 식민지지배에 대해서도 만약 일본의 침략이 없었다면, 조선사회도 스스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었는데, 일제의 강제 침략에 의해서 가능성이 꺾여 버렸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리 위에서 항일민족운동을 자주적 근대화의 기본 동력으로 주목하였으며, 일제의 침략 만행과 야만적 수탈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이러한 연구 경향은 흔히 ‘수탈론’이라고 부르는데, 조선후기 내재적 발전론과 함께 한국의 민족주의와 반일 정서에 기반을 두고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역사학 연구를 이끌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이러한 한국역사학계의 연구 방향, 즉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수탈론을 비판하는 주장이 안병직, 이영훈 등 경제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주장을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부른다.

내용

안병직은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중심 패러다임인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 부정하였다. 더불어 일제의 지배와 수탈 때문에 한국경제가 발전할 수 없었다는 식민지 수탈론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 그동안 한국사 연구자들이 지나치게 일제의 수탈과 이에 맞선 조선민중의 저항이라는 틀에 얽매어 있었다는 것이다(안병직, 1993).

그는한국 자본주의를 이식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으로 보았다. 그는 한국 경제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오늘날까지 개방체제를 유지해왔다고 보았다. 초기에는 조선정부의 저항으로 개항 수준이 낮았으나,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합병으로 개방성이 높아졌고, 1905년 화폐정리사업과 1923년 관세 철폐로 일본의 ‘엔 통화권’으로 포섭되었으며, 일본과 동일한 관세권 하에 놓이게 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로써 조선 경제가 일본 경제의 한 지역경제로 전락하였지만, 동시에 일본과 조선 간의 무역을 촉진시키고 일본으로부터의 자본 및 기술의 유입이 자유롭게 되어 한국의 산업화에 기여하였다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일본경제에의 예속성보다는 한국 경제의 개방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이처럼 개방체제를 강조하는 이유는 한국과 같은 저개발국에서 후발자본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발자본주의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개방체제가 기본 조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편 일제는 조선사회의 수탈을 위해 무작정 억압으로 일관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억압과 착취를 함과 동시에 식민지 개발을 위한 근대적 개혁도 단행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재정계획과 광무양전을 실시했는데, 재정개혁은 황실이 재정의 핵심을 틀어쥐면서 실패했고, 광무양전은 국가적 토지소유를 원칙으로 하는 결부제를 기본제도로 채용함으로써 근대적 토지소유 제도를 수립하는데 실패했다. 반면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식민지 권력은 화폐정리사업과 재정정리사업을 단행하여 근대적 재정제도를 수립했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근대토지 소유권제도를 확립하는 한편 토지소유자를 명확히 함으로써 안정적 지세수입을 확보하고 재정제도를 뒷받침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 산미증식으로 농업기반을 구축하고 농사방법을 개선함으로써 한국 농업이 한 단계 발전하였으며, 식민지 공업화 정책으로 한국인들이 최초로 자본주의적 고통을 겪었지만, 이를 통해 나름의 근대적 변신을 꾀해갈 수 있었다고 본다. 이러한 개발과정에서 조선인은 소농사회를 바탕으로 농민, 자본가, 노동자 등이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담당주체로 활발히 성장해 갔다고 보았다.

이영훈도 안병직과 같은 논리적 바탕 위에서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수탈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의 문제점을 3가지로 정리하였다(이영훈, 1996).

첫째, 조선 중세경제가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수공업이 독자적으로 발전해야 하는데, 조선후기에 농촌공업이 성립한 적이 없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공업의 발전과 관련하여 자주 거론되어 온 광업·제철업·유기업 등이 국역(國役)체제에서 벗어나 사적 상품생산체계로 진입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도 과대평가되어 왔다고 했다.

둘째, 농업의 발전방향을 설명할 때, 조선 고유의 자연적 사회적 조건의 특질을 무시하고 영국 근대농업을 설명하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내재적 발전론자들이 농업에서의 양극분해의 추세와 부농의 존재를 찾아냄으로써 맹아론의 이론적, 실증적 기초를 확보하고자 노력하였고, 그 성과로 이른바 광작농민(廣作農民)이나 경영형 부농(經營型 富農)이 자본주의적 농업의 주도층이라고 파악하였지만, 양극분해의 추세나 부농의 성장이 장기 시계열의 사례로 입증되지는 못했다고 설명하였다. 오히려 장기 추세는 역의 방향, 말하자면 조선 농업경제가 상층 경작농이 감소하고 균등한 규모의 하층 소농이 증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17세기 이후 농촌의 정기시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시장경제의 성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동안 내재적 발전론은 18세기 후반 조선의 장시 밀도와 상호 연계 유통망은 세계적 수준이었고, 17세기 후반부터 금속화폐인 동전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등의 발전을 이룩했다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시장 경제의 발전 자체를 내재적 발전론에서 근대적인 것으로 평가하였지만, 그 이론적 기초가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평가하면서, 조선후기 농촌 장시를 단위로 한 시장경제의 발전은 전국적 물류 가운데서 국가적 배분체계가 점했던 비중을 전제한 위에, 농업에서 전개된 소농경제의 성숙이라는 발전방향과의 관련성에서 다시 파악해야 하며, 시장경제의 근대적 발전을 지나치게 평가했다고 보았다.

이러한 조선후기상의 토대 위에서 이영훈은 개항 이후 일제 시기까지 경제구조의 변화를 안병직과 같은 논리로 바라보았다. 그는 “개항이 한국적 근대의 기점이었다면, 식민지 초기 1905년∼1918년 간 일제에 의해 화폐·금융·재정의 근대적 제도가 이식되고,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근대적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됨으로써 제도적 형식의 제1단계가 성립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서유럽이 장기간의 이행과정에서 성취한 근대의 형식·제도가 불행하게도 전통에 의해 재규정된 형태로 소화되지 못하고 순전히 외래적인 근대로, 그래서 역설적으로는 가장 선진적인 형태 그대로 이식된 것이다.”(이영훈, 1996)라고 하여 일제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을 서구의 자본주의가 한국사회에 도입되고 정착하는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일제침략기가 되면 “근대적 제도의 정비에 따라 식민지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이영훈, 1996)고 평가하였다. 그리고는 “식민지기의 경제는 1930년을 전후한 공황기의 단절이 있지만, 평균적으로 연 3.7%의 성장률을 보였다. 근대 경제에 고유한 장기지속적·자기유지적 경제성장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중략) 성장의 동력은 일본과의 수출입 및 일본으로부터의 자본유입에 있었다. 미곡생산의 증대로 일본으로의 수출이 증가하고, 그에 따라 국내 공산품 수요시장이 확대되었으며, 이 시장을 상대로 일본상품의 수입 및 직접투자가 이루어진 것이 식민지기 경제성장의 기본 메커니즘이다. 농·공간의 다이내믹스가 국민경제로 성립하지 않고, 식민지 농업과 제국주의 공업 사이에서 성립한 점에서 기본적으로 식민지적 공업화의 유형이었다.”(이영훈, 1996)고 정리하였다.

이러한 논의를 토대로 이영훈은 조선후기의 역사상, 특히 19세기를 진단하면서 “위기는 1905년 조선왕조의 멸망이 어떤 강력한 外勢의 작용에 의해서라기보다 그 모든 체력이 소진된 나머지 스스로 해체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19세기의 역사상은 1950년대 이래 그들의 전통사회가 정상적인 경로로 발전해 왔으며, 그들의 역사가 왜곡된 것은 제국주의의 침입 때문이라고 굳게 믿어온 한국의 많은 역사학자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있다.한국의 역사학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다. 역사학만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자신의 정체성 확인과 관련하여 지난 50년간 구축해 온 모든 방면에서의 言說體系(담론체계)가 근본적인 재구성을 요구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이영훈, 2004)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조선후기 사회의 자주적 발전과 개항 후 외세,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한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수탈, 그리고 이에 맞섰던 저항운동 연구를 통해서 식민사관을 극복하였다고 자부하던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충격적이었다. 그들의 눈에 식민지 근대화론은 자주적 근대화를 부정하고, 일제 식민지 지배를 긍정하는 주장이며, 지나치게 경제성장 중심으로 역사를 파악한다고 생각되었다. 이에 대해 신용하, 정태헌, 고석규 등 여러 학자들의 반론이 이어졌고, 이 반론에 대한 반론이 이어지면서 일대 논쟁이 1990년대 중반부터 10년 이상 계속되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낙성대 경제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발표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 미국에서도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동의하는 학자들의 움직임도 합쳐지면서(호리 가즈오, 2003; 마이클 로빈슨·신기욱 엮음, 2006; 카터 에커트, 2008) 점차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처음에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거부하던 내재적 발전론과 수탈론의 입장에선 학자들도 논쟁이 거듭되면서 점차 자신의 논리를 수정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의 비판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내재적 발전론이 봉건제에서 자본제로의 이행이라는 단선적인 역사발전론에 입각해 자본주의 맹아론을 고집해 왔고, 서구중심적인 역사발전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은 이제 상당히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식민지 시기와 해방 후 경제의 긍정적 연속성을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도 실증적 기초를 결여하고 있지만, 부정적 연속성만을 내세우던 수탈론도 문제가 있으므로, 식민지 근대화론의 합리적인 문제제기는 수용하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현황

식민지 근대화론은 내재적 발전론과 수탈론을 중심으로 한 기존 역사 연구의 흐름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역사 연구의 입장이다. 분명히 식민지 근대화론은 기존 연구자들에게 상당히 큰 충격을 주었으며, 상호 비판, 반비판을 통해서 연구의 다양성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동안 여러 가지로 논쟁이 진행되었지만, 이 둘 사이의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 논쟁이 단순한 연구 내용의 차이만이 아니라,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사관(史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신용하, 나남출판, 2009)
『제국의 후예』(카터 에커트, 푸른역사, 2008)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마이클 로빈슨·신기욱 엮음, 삼인, 2006)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이영훈 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숨은 신’을 비판할 수 있는가-김용섭의 ‘내재적 발전론’」(윤해동, 『역사학의 세기』, 휴머니스트, 2009)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연구사적 접근」(이수빈,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9)
「조선 전통사회의 경제적 유산: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연구성과를 중심으로」(우대형, 『역사와 현실』68, 한국역사연구회, 2008)
「‘식민지 근대화’ 재론」(김낙년, 『경제사학』43, 경제사학회, 2007)
「한국 근대의 공업화」(호리 가즈오, 『전통과현대』, 2003)
「다시 생각하는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과 민족주의」(고석규, 『문화과학』31, 2002)
「식민지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 재검토」(조석곤, 『동향과 전망』38, 1998)
「1960-70년대 '내재적 발전론'과 한국사학」(김인걸, 『한국사인식과 역사이론』, 지식산업사, 1997)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이영훈, 『경제사학』21, 경제사학회, 1996)
「일제하 경제사인식의 정립을 위한 시론」(정태헌, 『역사와 현실』12, 한국역사연구회, 1994)
「한국경제발전에 관한 연구의 방법과 과제: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안병직, 『경제사학』, 경제사학회,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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