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관악구와 금천구, 서쪽은 경기도 부천시, 북쪽은 영등포구와 양천구, 남쪽은 경기도 광명시와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6°48'~126°54', 북위 37°27'~37°30'이다. 면적은 20.12㎢에 이른다. 인구는 184,096세대 392,405명(2024.1.1. 현재)이다. 행정구역은 16개 행정동(10개 법정동) 629통 4,929반으로 나뉜다. 구청은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에 있다.
지형은 안양천과 도림천에 의해 형성된 범람원의 저평한 지역이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 50m 이하의 낮은 고도를 이루는 충적층이다. 서부는 김포준평원(金浦準平原)이 전개되어 150m 미만의 낮은 파랑상 구릉이 나타난다.
구로구와 양천구 및 경기도 부천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와룡산(臥龍山, 114m), 항동과 천왕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굴봉산(窟峰山, 145.6m), 오류동과 개봉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개웅산(開雄山, 125m)이 있다. 굴봉산의 오류동 방면에는 천왕공원을, 개웅산의 오류동 일대에는 오류공원을, 굴봉산의 항동 일대에는 항동공원을 각각 지정하여 산책로와 함께 시민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 되었다.
경기도 시흥시 목감동의 630고지 서쪽 계곡에서 발원한 목감천이 구로구와 경기도의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 흘러 안양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오류동에서 흘러나오는 오류천이 목감천에 합류되나 현재는 복개되어 있다.
한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어 편서풍대의 영향을 받아 연평균 기온은 13.3°C, 1월 평균기온은 0.4°C, 8월 평균기온은 26.5°C이며, 연 강수량은 1,212.3㎜ 내외이다.
구로구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 · 신석기시대 유적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이 지역이 한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고, 한강 유역의 하남시 미사리유적이나 강동구 암사동 유적에서 선사시대 인류가 살았던 흔적, 강남구 역삼동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선사유물, 서초구 원지동의 지석묘군 등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도 일찍부터 우리 조상들의 생활터전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고대국가로서 마한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서기전 18년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점차 마한제국을 병합하여 삼국 중 하나인 백제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한강 유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고구려 · 백제 · 신라 삼국의 쟁패가 계속 이어졌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남하정책을 펴면서 한강 유역을 공략하여 석현성과 관미성 등 10여 성을 함락하고 이어 백제 서해안을 공격하여 58개 성을 취하였다. 이어 장수왕 때는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 장악하였고, 이 일대에 잉벌노현(仍伐奴縣: 지금의 시흥시와 광명시 지역), 율목군(栗木郡: 지금의 과천시 지역), 주부토군(主夫吐郡: 지금의 구로구 안양천 서쪽일대)을 설치하여 80여 년간 다스렸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당나라와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고구려 · 백제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세력이 고구려와 백제를 잇는 수직라인과 신라와 당을 연결하는 수평라인이 서로 대립되었고, 당나라 세력을 이용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통일을 달성한 신라는 신문왕대에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로 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이때 잉벌노현은 곡양현(穀壤縣)과 장구현(獐口縣)으로, 주부토군은 장제군(長堤郡)으로 바뀌어 구로구의 안양천 동쪽 지역인 곡양현은 율진군(栗津郡)에, 서쪽 지역은 장제군에 각각 소속되었다.
후삼국시대 ‘구로 지역’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각 지역에 호족세력들이 건재하였는데 한강유역 일대에는 왕규(王規)의 세력이 가장 강대하였고, 강감찬(姜邯贊)의 후손인 금주 강씨(衿州 姜氏 혹은 衿川 姜氏) 세력과 풍덕 유씨(豊德 柳氏) 세력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왕규는 경기도 광주 일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금주 강씨는 금천구와 구로구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풍덕 유씨 세력들은 한강 하류의 마포 서쪽지역 일대에 웅거하고 있었다.
고려 건국 후 구로구 지역은 금주(衿州)로, 율진군은 과주(果州)로, 장구현은 안산현(安山縣)으로 바뀌었다. 995년(성종 14) 고려의 행정구역을 5도로 나누면서 관내도(關內道)에 예속되었고, 금주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단련사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혁파하였다. 1018년(현종 9) 다시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경기도의 수주현(樹州縣)이 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서 수도를 한강 북쪽의 한양으로 옮기고 행정제도를 개편하였다. 1394년(태조 3) 먼저 경기도를 좌 · 우도로, 양광도를 충청도로, 강릉교주도를 강원도로, 서해도를 풍해도로 바꾸었는데 이때 구로구는 경기좌도 과천군(果川郡)에 소속되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금주를 금천현(衿川縣)으로 개명하고 현감(縣監)이 두어졌다. 이후 1795년(정조 19)에는 금천현 지명을 시흥현(始興縣)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안양천 서쪽 지역은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에 소속되어 있는 수탄면(水呑面)이었다. 그 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인천부 시흥군으로 승격되었고, 수탄면 일대는 부평군이 되었으며, 이듬해 23부제가 폐지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0년 조선의 국권을 강제 침탈한 일본은 조선의 전통적인 지방제도와 생활권을 이루고 있는 행정 구역의 개편을 시도하여 1914년 지방제도를 12부 317군에서 12부 220개 군으로 폐지 혹은 통합하였다. 이때 경기도 시흥군 북면과 동면, 그리고 계남면으로 불렸으며, 1936년 시흥군 북면의 일부 지역은 경성부로 편입해 영등포출장소에서 행정을 담당하였다. 당시 북면 지역은 도림리와 구로리, 동면은 독산리 · 가리봉리 · 시흥리, 계남면은 고착리 · 오류리 · 개봉리 · 궁리 · 온수리 · 천왕리 · 항리 일대가 소속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해방 이후에도 경기도 시흥군과 부천군에서 분할, 소속되어 있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었다. 이때 서울시의 영역을 대규모로 확대하면서 10개 출장소를 설치하였는데 구로구의 동부 지역인 가산과 시흥리 일대는 영등포구 관악출장소 관할에 속하였고, 서부 지역은 오류출장소 관할에 들어갔다. 관악출장소에서는 독산동 · 시흥동 · 가리봉동을 관할구역으로 하였고, 오류출장소에서는 고척동 · 개봉동 · 오류동 · 궁동 · 온수동 · 천왕동 · 항동을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이후 1980년 4월 1일 구로동 공업단지를 중심으로 발전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영등포구의 구로동, 가리봉동, 독산동 등 남부지역을 나누어 구로구를 신설하였다. 당시 구로구에 편입된 지역은 구로동, 가리봉동, 독산동, 시흥동, 고척동, 개봉동, 오류동, 온수동, 궁동, 천왕동, 항동과 신도림동 일부지역이었다. 1995년에는 금천구가 분구되어 독산동, 시흥동, 가리봉동 일부 지역이 금천구로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구로구에는 10개의 법정동을 가지고 있다.
이 지역은 풍부한 노동력과 물줄기, 그리고 교통의 편리함 때문에 1970년대 말 공업단지의 대명사로 불리면서 많은 공장이 유치되었으나 인구가 밀집되고 공해가 발생됨에 따라 공업단지를 이전하게 되었고, 현재는 기계공구상가와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산업구조 재편으로 최대의 첨단 벤처타운이 조성되어 있다.
이 지역은 예부터 농사를 짓던 지역으로 남아 있는 국가유산이 많지 않다. 고척동에 있는 여계 묘역이 1991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어 있고, 오류동에 있는 류순정 · 류홍부자 묘역은 2004년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외에 역사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궁동에 위치한 정선옹주(貞善翁主) 묘역과 천왕골과 항동의 경계에 있는 노숭(盧崇)의 묘 등이 있다.
건물로는 오류2동의 주막거리객사, 궁동에 있는 현민 유진오(兪鎭午) 별장 등이 있으며, 관방유적으로는 개웅산의 봉수대 터 등이 있다. 또한 고척동 오류중학교 뒤에 있는 고인돌 등도 역사의 숨결이 묻어 있는 곳이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4개교, 중학교 13개교, 고등학교 14개교, 특수학교 2개교, 대학교는 성공회대학교와 한영신학대학이 있다.
1960년대 이전의 이 지역은 논밭과 야산이 대부분이었으나, 이후 공업 단지가 조성되면서 도시화되었기 때문에, 서울특별시의 다른 자치구에 비해 국가유산이 적고 대학교, 종합병원, 공원 등의 편의 시설과 공연장, 박물관, 전시관 등의 문화 시설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경제 성장과 함께 문화 복지 분야의 투자가 증대되면서 종합병원, 공원, 도서관 등이 신설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지방 자치가 뿌리 내리면서 곳곳에 문화체육시설, 복지시설, 구민회관, 극장, 공원 등 문화 공간이 점차 확충되어 가고 있다.
1989년 구로동에 개관한 구로구민회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규모에 대강당 생활체육시설 등을 갖추어 놓았으며, 2005년에는 지역 문화 발전을 위한 구로문화원이 개관되어 지역 문화 행사를 개최하고 각종 문화 예술 강좌를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에는 공연 공간 확대를 위해 오류역과 고척 근린공원에 야외무대를 만들어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제공되고 있다.
구로동 애경백화점에 있는 CGV 구로 10 영화관은 10개의 상영관에 2,289개의 객석을 갖춘 공간으로 많은 시민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도서관으로는 고척동에 서울특별시립고척도서관이 1990년 개관하였고, 구로동에는 서울특별시립구로도서관이 1984년 개관하여 일찍부터 시민들의 지식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박물관으로는 오류동에 고고유물 212점을 전시해 놓은 평강성서유물박물관이 1999년 개관하였다. 이 박물관은 미국의 고고학자 케네스 바인의 소장 유물을 기증받아 설립되었으며, 고대 이집트와 오리엔트문명의 유물 3천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미이라와 이집트의 신상, 로마시대의 유리병, 이스라엘의 고대 금화 등 성서와 관련된 역사적 유물을 3개의 전시실에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종합스포츠센터와 같은 시설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고, 시민들의 생활체육 위주로 공원이나 하천변의 공간을 이용하고 있다. 구로동에 개관한 구로구민회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규모에 대강당 생활체육시설 등을 갖추어 놓았으며, 안양천의 안양교에서 신정교 사이 둔치에 형성한 체육생태공원에는 인라인스케이트장, 배드민턴장, 게이트볼장 등의 운동시설을 갖추어 놓고 있어 많은 시민이 즐겨 찾는다. 그리고 구로구청에서 생활체육 활성화를 위해 구민생활체육관에서 탁구, 인라인스케이트, 요가, 단전호흡, 에어로빅 등의 체육교실을 주기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 외에 천왕공원이나 온수공원에 산책로와 간단한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고척동의 계남공원이나 고척근린공원 등에도 체육시설을 설비하여 많은 시민들의 생활체육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이 지역만의 특별한 세시풍속은 없으며, 우리나라 전역에서 계절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세시풍속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정월 초하루에는 설날을 맞아 각 가정에서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드리는 풍속이 남아있다. 정월 열나흘에는 오곡밥 먹기, 정월 대보름의 부럼 깨기와 더위팔기, 윷놀이, 연날리기 등이 행해진다. 사월 초파일에는 절에 가서 연등달기, 칠월 복중에 개고기와 삼계탕 먹기, 추석 차례와 성묘가기, 동지 때 팥죽 먹기 등의 세시풍속이 펼쳐진다.
정월대보름에는 노인정과 아파트 등을 중심으로 척사대회와 지신밟기, 농악놀이 등이 벌어지며 쥐불놀이 등은 도심지라는 점 때문에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다.
이 지역은 서울시의 다른 곳과 달리 예부터 시골이었기 때문에 마을 도당제(都堂祭)가 성행하였다. 구로1동 도당제, 수궁골 도당제, 항골 산신제, 오류동 도당제, 개봉동 도당제, 천왕골 도당굿, 고척동 도당제 등이 있었다. 특히 수궁골 도당제는 마을 사람들이 매년 정월보름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도당제를 올리고 농악과 풍물패들은 온 마을을 돌면서 지신밟기와 안택굿을 벌였다. 항골 산신제도 정월 대보름에 동신제를 올려 안녕과 축복을 구하고 10월 상달에는 지난 1년간의 농사와 함께 정월에 빌었던 것을 성취했음에 대해 감사의 뜻으로 농공제와 성주제 두 가지로 나누어 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동신제는 하지 않고 10월의 감사제만 지내며 마을 사람 모두의 축제로 치러지고 있다.
이 지역에는 개봉동 느티나무 전설과 천왕동 하정승(河政丞) 전설이 남아있다. 천왕동에 전하는 하정승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 이곳이 부평 땅이었을 때 원님이 부임하여 첫날밤에 죽는 일이 계속 생겨났다. 세 번째 부임한 원님까지도 그 이튿날 시체로 변하였는데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나라에서도 이 일을 안타깝다고 생각하여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 날짜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무장을 부평 원님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부임한 원님은 첫날밤 촛불을 밝히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시경이 되었을 무렵 일진광풍이 일면서 촛불이 꺼졌다. 담력이 강했던 원님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방문이 열리더니 머리에 옥관자를 한 선비가 나타났다. 원님은 그 모습을 보자 보통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머리를 조아려 “어인 일로 이 밤중에 행차하셨습니까?” 하며 공손히 예를 올렸다. 그 선비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내가 이제야 사람을 만났군.” 하면서 자리에 앉아 정좌하였다. 그리고는 “나는 신현(新峴)의 뱀내에 묻혀 있는 하연(河演)이요.”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원님은 이 말을 듣자 등이 오싹하면서 식은땀이 났다. 세종대왕 때 영의정을 지내다가 바로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던 문효공(文孝公) 하연 정승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정승은 또 말하기를, “내 묘역에 도벌꾼이 들어와 나무를 마구 베어가고 있으니, 이를 막아주기 바라오, 내가 이 일을 요청하러 오면 그때마다 원님들이 혼절하여 죽어버리니, 매우 안타까웠소. 하나 그대는 마침 담력이 매우 커서 이 일을 실천할 수 있을 듯하니, 꼭 막아주기 바라오, 그대가 내 소원을 들어주면 나도 그대를 도우리라.”라고 하였다. 원님은 “대감의 소원을 이제 알았으니, 날이 밝는 대로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그러니 모쪼록 이제 저승에서 편안하게 주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정승의 소원을 달래주었다. 이튿날 아침 원님이 죽은 줄 알고 시체를 처리할 준비를 하고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전들은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원님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원님은 곧바로 도벌꾼을 색출하여 벌을 주었다. 나라에서도 벌목은 금하고 있던 터라 도벌꾼을 색출한 공을 세운 원님은 사면되었다고 한다.
토지의 15.7%가 임야이고 경지는 전체 토지의 5.5%이다. 대지 40.1%, 공장용지 2.9%, 도로 13.7%, 철도용지 4.6%로 전체 토지에서 대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다.
산업 인구 가운데 제조업 종사자는 18.3%, 건설업 7.2%, 도소매업이 20.2%, 숙박 및 음식업이 7.8%, 운수업 6.6%, 금융 및 보험업 2.5%, 부동산 및 임대업 3.0%, 사업서비스업 14.8%, 교육서비스업이 5.3% 등의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전체 사업체수 가운데 1∼4명의 종사자를 가지고 있는 사업체가 전체의 83%라는 압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1,000명 이상의 사업체는 3개 업체이다.
서울시로 진입하는 남서관문으로 서해안고속도로와 연계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1978년에 개통된 남부순환도로와 서부간선도로가 여러 지역과 원활한 연결도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철도로는 경부선과 경인선이 통과하고 있고, 수원과 인천방면의 지하철 1호선과 순환노선인 2호선이 통과하고, 2000년 7호선이 개통되면서 서울로 진입하는 인천과 경기도 서남부 지역의 주요한 관문 역할은 물론 한강 서남쪽 지역의 교통의 요충지로 급부상 하고 있다.
구로구 지역을 남북으로 남부순환로와 고척길이 지나고 동서로는 경인로가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안양천을 따라 서쪽의 안양천길과 동쪽의 서부간선도로가 서울시로 진입하는 서해안고속도로와 연결되며 도로의 중추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구로동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구로큰길도 경인로와 연계되어 이 지역 교통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도로의 크기에 따라 광로(廣路) · 중로(中路) · 소로(小路)를 모두 합하면 총연장은 282㎞에 달하며, 도로 포장률은 99.97%이다. 폭 40m 이상의 넓은 도로는 서부간선도로, 경인로, 구로큰길, 남부순환로 등이 있다. 이 외에 간선도로로 궁골길, 고척동길, 온수동길, 오류동길, 개봉로, 가마산길, 구일길, 구로동길, 공단로 등의 도로가 있어 동서남북 사통팔달로 이어진다.
지하철 1호선은 1971년 시청 앞에서 청량리역까지 공사를 착공하여 1974년에 개통되었고, 전철과 연결되어 성북과 수원을 운행하였다. 이후 의정부 북부와 천안까지 확대하여 모두 59개 역이 되었다. 구로구를 지나는 1호선은 전철 구간으로 구로역, 구일역(동양공전 앞), 개봉역, 오류동역, 온수역이며, 구로역에서 천안행 열차를, 온수역에서 7호선을 각각 갈아탈 수 있다.
지하철 2호선은 서울 강남과 강북의 도심권 43개 역을 순환하는 노선으로 1978년 3월에 착공하여 1984년 5월 완공되었다. 구로구를 지나는 2호선 구간은 구로디지털단지역, 대림역, 신도림역으로 영등포구와 경계선을 이루며 달리고 있고, 신도림역에서 1호선을, 대림역에서 7호선을 갈아탈 수 있다.
지하철 7호선은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에서 구로구 온수역까지 42개 역을 운행하는 전철로 1990년 착공하여 2000년 8월 완전히 개통되었으며, 이 중 구로구 지역은 2000년 7월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구로 지역을 지나는 7호선은 대림역, 남구로역, 천왕역과 온수역(성공회대입구)이며, 온수역은 종착역이기도 하고 1호선을 갈아탈 수 있으며 대림역에서는 2호선으로 환승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문화유적지로서의 함양 여씨 여계 묘역과 평강 성서유물박물관, 고척근린공원, 안양천 체육생태공원, 구로동 화원어린이공원, 구로 기계공구상가단지 등이 있다.
여계 묘역은 조선시대 초기의 묘역으로 묘지 양식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는 곳인데 역사학자와 문화유적 답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평강 성서유물박물관은 외국인의 기증을 받은 고고학 관련 유물을 갖추어 놓아 다른 박물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곳이다. 구로 기계공구상가단지는 각종 기계에 소요되는 부속품과 공구를 살 수 있는 집단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안양천 체육생태공원도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공원 안에 각종 체육시설은 물론 만남의 광장과 야생초 화원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생태체험도 가능한 곳이어서 생활체육을 즐기는 동호인들과 일반 시민의 발길이 많은 곳이다. 이 외에 고척근린공원이나 구로동 화원어린이공원도 시민들에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1990년 이후 구로구는 구민들의 문화 욕구를 충족하고 지방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개최해오고 있다. 각계각층의 구민이 참여하는 ‘구로문화축제(JumpGURO)’는 2003년 이래로 매년 10월 초에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어 구로구 문화축제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 이 행사는 구로구가 이전의 공단 이미지를 벗고 새로운 문화도시로, 벤처산업의 집결지로 거듭나는 것을 기본 지향으로 하며, ‘벤처인 마라톤 대회’를 비롯한 다채로운 행사들로 구민 화합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이 외에도 구로구청의 주관 하에 각종 미술전, 서예전, 음악축제 등이 매년 시민들과 함께 개최되고 있다.
구로구의 동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가리봉동의 동명 유래는 이 마을 주위의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한 데서 붙여졌다 한다. 또 다른 하나는 골[谷], 즉 고을과 같은 의미를 갖는 ‘갈’ 또는 ‘가리’, ‘갈라졌다’는 뜻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금천현이었다가 1795년(정조 19) 시흥현으로 바뀌었고, 1895년 시흥군 동면 가리봉리였다.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가리봉동이 된 후 1980년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구로구의 법정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으로 독산동, 서쪽과 남쪽으로 광명시, 북쪽은 구로동과 접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1970년대 이후 공업화에 발맞추어 구로공업단지가 들어섰으며, 후에 서울시 외곽으로의 공업단지 이전 정책에 따라 대부분이 서해안 쪽으로 옮겨 가고 일부만이 남아 있다. 오늘날에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IT산업과 관련된 첨단 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남부순환도로가 동의 남쪽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지하철은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과 대림역, 7호선 남구로역이 있다. 행정동으로는 가리봉1동과 가리봉2동이 있다.
구로구의 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개봉동 동명의 유래는 경인선과 남부순환로가 교차하는 남쪽에 있었던 개웅(開雄)마을의 이름에서 유래하는데, 개웅의 ‘개(開)’자와 양천구 신정동과 경계를 이루는 매봉산의 ‘봉(峰)’자를 합한 것이다. 조선시대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 갈탄(葛灘)이었으며, 1895년 부평군 수탄면(水呑面)이 되었고, 1914년 부천군 계남면(桂南面) 개봉리(開峰里)로 바뀌었다가 1941년 부천군 소사읍 개봉리가 되었다.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개봉동이 된 후 1980년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구로구의 법정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은 고척동 구로동 및 광명시, 서쪽은 오류동, 남쪽은 광명시, 북쪽은 고척동과 양천구 신정동에 접해 있다. 남부순환도로가 중앙을 동서로 관통하고, 1호선 전철의 개봉역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행정동으로는 개봉1동, 개봉2동, 개봉3동, 개봉본동의 4개 동이 있다.
구로구의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고척동의 동명 유래는 마을인 고좌리(高座里), 즉 높은 곳에 생긴 마을이라는 것에서 연유되었다. 조선시대 부평도호부 수탄면이었으며, 1914년 부천군 계남면 고척리(高尺里)로 바뀌었다가 1941년 부천군 소사읍 고척리가 되었다.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개봉동이 된 후 1980년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구로구의 법정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으로 구로동, 서쪽과 북쪽으로는 양천구 신정동, 남쪽으로는 개봉동에 접해 있다. 행정동으로는 고척1동과 고척2동이 있다.
구로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구로동의 동명은 옛날 이 마을에 아홉 노인이 오랫동안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중국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인 백거이(白居易)가 낙양(洛陽) 용문산(龍門山) 동쪽에 석루(石樓)를 짓고 시인 8명과 함께 시회(詩會)인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를 만들어 즐긴 것을 아름답게 여긴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 금천현이었다가 1795년(정조 19) 시흥현으로 바뀌었고, 1895년 시흥군 상북면(上北面)에 속했으며, 1914년 시흥군 상북면 구로리가 되었다. 이후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된 후 1980년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구로구의 법정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으로 독산동과 영등포구 문래동 및 관악구 신림동, 서쪽으로 고척동, 남쪽으로 가리봉동과 경기도 광명시, 북쪽은 신도림동과 영등포구 문래동과 접해 있다. 구로구의 중심동으로서 구로구청과 구로경찰서 등의 행정기관이 밀집되어 있고, 영화관을 갖추고 있는 애경백화점, 평강 성서유물박물관, 구로구민회관, 구로문화원, 구로문화예술회관 등의 문화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행정동으로는 구로본동을 비롯하여 구로1동에서 구로6동까지 7개 동이 있다.
구로구의 서부에 위치한 동으로, 행정동인 수궁동이 궁동과 온수동을 담당하고 있다. 궁동의 동명은 조선 선조의 정선옹주(貞善翁主)가 이곳에 살던 길성군(吉城君) 권대임(權大任)에게 출가하여 궁궐 같은 큰집에서 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부평도호부 수탄면 궁리(宮里)였으며, 1895년 인천부 부평군 수탄면이 되었고, 1914년 부천군 계남면 궁리로 바뀌었다가 1941년 부천군 소사읍 궁리가 되었다.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궁동이 된 후 1980년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구로구의 법정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으로 오류동 · 개봉동, 서쪽으로 경기도 부천시, 남쪽으로 온수동 · 오류동, 북쪽으로 양천구 신정동과 접해 있다. 역사 유적지로는 동명의 유래와도 관련이 깊은 정선옹주(貞善翁主) 묘역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근대 인물 가운데 현민 유진오(兪鎭午) 별장이 이곳에 있다. 이 지역의 행정은 수궁동사무소가 담당하고 있다.
구로구의 중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신도림동 동명의 유래는 도림동에서 새로 갈라져 나왔으므로 붙여졌다. 조선시대 금천현이었다가 1795년(정조 19) 시흥현으로 바뀌었고, 1895년 시흥군 상북면(上北面)에 속했으며, 1914년 시흥군 북면 도림리가 되었다. 이후 1949년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될 때 신도림동이라 하였고, 1980년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구로구의 법정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으로 구로동과 영등포구 도림동, 서쪽으로 양천구 신정동, 남쪽으로 구로동, 북쪽으로 영등포구 도림동과 접해 있다. 안양천을 따라 서부간선도로가 지나고 있고, 지하철 2호선의 신도림역은 1호선과 환승할 수 있는 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다. 이 지역의 행정은 신도림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구로구의 서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오류동의 동명은 예부터 오류동 123번지 일대와 그 서쪽에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오류꿀이라 부른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부평도호부 수탄면 오류동이었으며, 1895년 인천부 부평군 수탄면이 되었고, 1914년 부천군 계남면 오류리로 바뀌었다가 1941년 부천군 소사읍 오류리가 되었다. 이후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오류동이 되었고, 1980년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구로구의 법정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으로 개봉동, 서쪽으로 궁동, 남쪽으로 천왕동 · 항동, 북쪽으로 개봉동이 접해있다. 전철 1호선 오류역과 지하철 7호선 천왕역이 남북으로 지나고 있으며, 오류동의 행정은 오류1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구로구의 서부에 위치한 동으로, 행정동인 수궁동이 궁동과 온수동을 담당하고 있다. 온수동의 동명은 옛날 이 지역 일대에서 더운물이 나왔기 때문에 ‘온수골’이라 하다가 온수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시대 부평도호부 수탄면 온수동이었으며, 1895년 인천부 부평군 수탄면이 되었고, 1914년 부천군 계남면 온수리로 바뀌었다가 1941년 부천군 소사읍 온수리가 되었다. 이후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온수동이 되었고, 1980년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구로구의 법정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으로 오류동, 서쪽과 남쪽으로 부천시, 북쪽으로 궁동이 접해 있다. 지하철 7호선의 종착역인 온수역이 있고, 이 역은 1호선과 환승할 수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이 지역의 행정은 수궁동사무소가 담당하고 있다.
구로구의 서남부에 위치한 동으로 행정동인 오류2동이 천왕동과 항동 및 오류동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천왕동의 동명은 이 동의 뒷산이 굴봉산이고, 굴봉산 골짜기에 천왕사(天旺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부평도호부 수탄면 천왕리(天旺里)였으며, 1895년 인천부 부평군 수탄면이 되었고, 1914년 부천군 계남면 천왕리로 바뀌었다가 1941년 부천군 소사읍 천왕리가 되었다. 이후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천왕동이 되었고, 1980년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구로구의 법정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과 남쪽으로 경기도 광명시, 서쪽으로 항동, 북쪽으로 오류동과 접해 있다. 이 지역의 행정은 오류2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구로구의 서남부에 위치한 동으로, 행정동인 오류2동이 천왕동과 항동 및 오류동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항동의 동명은 풍수지리학적인 면에서 살펴볼 때 마을 형태가 배 모양이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항동(巷洞)이었던 것이 항동(航洞)으로 바뀐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巷’은 마을 또는 市街의 안길이라는 뜻이니 큰길에서 비껴 앉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부평도호부 옥산면(玉山面) 항동이었으며, 1895년 인천부 부평군 옥산면이 되었고, 1914년 부천군 계남면 항리로 바뀌었다가 1941년 부천군 소사읍 항리가 되었다. 이후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항동이 되었고, 1980년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구로구의 법정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으로 천왕동, 서쪽으로 경기도 부천시, 남쪽으로 경기도 시흥시, 북쪽으로 온수동과 오류동이 접해 있다. 천왕골과의 경계지역에 노숭의 묘가 있으며, 예부터 농사를 짓던 곳으로 항동저수지가 남아 있다. 이 지역의 행정은 오류2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