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438년(세종 20)에서 1442년(세종 24) 사이에 조성된 태실로,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1기를 합쳐 모두 19기로 조성되었다. 이 태실이 자리잡은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던 곳으로,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묘를 이장하도록 하고 태를 안치하였다 한다.
태실의 전체면적은 5,950㎡로,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은 방형의 연엽대석(蓮葉臺石)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다. 태실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형식 · 구조는 연엽형의 개첨석(蓋簷石, 밑지름 102㎝, 높이 42㎝), 구형의 중동석(中童石, 높이 60㎝), 석함(石函)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실 비문에 ‘□□(대)군명태장 황명연호년월일입석(□□(大)君名胎藏 皇明年號年月日立石)’이라고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한편, 세조 태실은 그가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세워두었는데, 현재 비문은 마모되었고, 조선왕조실록에 비문이 수록되어 전한다. 1977년 태실 정비사업 과정에서 분청인화문개(粉靑印花紋蓋) · 분청인화문완(粉靑印花紋盌) · 평저호(平底壺) · 지석(誌石)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태를 봉안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김유신 장태(藏胎)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고려 왕실에서 태봉안양식(胎奉安樣式)이 성립된 후 조선시대까지 그 맥락이 이어진 오랜 전통을 가진 것으로, 태봉에 태를 봉안하기 위한 석물의 구성은 우리나라에서만 행해졌던 독특하고 독자적인 문화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태실은 왕과 태자에 대한 태실만을 조성하던 고려시대의 태 봉안 양식이 변화되어 왕과 왕비, 그리고 그 자녀의 태실을 조성하기 시작한 조선시대 최초의 왕자 태실로서 의미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 태실은 우리나라에서 왕자 태실이 완전하게 군집(群集)을 이룬 유일한 곳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의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국가유산의 가치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