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생. 본명은 임영규(林泳圭).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하여 4학년 때 전주 도립극장에서 있었던 한동인(韓東人) 발레단의 공연을 보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1947년 4월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한동인 발레단의 공연에 출연하는 등 무용수로 활동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발레단의 활동이 중단되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1951년 3월일본 니혼고등음악학교 피아노과에서 입학한 후 핫도리 시마다(服部島田) 발레단의 「레 실피드」 공연을 보고 환상적인 장면에 감동하여 1952년 재일동포 백성규가 운영하던 발레연구소에 입학했다. 이후 핫도리 시마다 발레단에서 무용수로서 두각을 나타냈고, 1953년에는 새로 창단된 도쿄청년발레단이 공연한 「백조의 호수」 2막 공연에서 주역을 맡기도 했다.
1953년 5월에 귀국하여 임성남발레연구소를 개소한 후 경기여자대학과 수도여자사범대학 전임강사로 있으면서 서구식 발레 교육을 시도했다. 1954년 「백조의 호수」 2막을 포함하여 「목신의 오후」, 「장미의 정」 등을 선보였으며, 1956년에는 ‘임성남 발레단 귀국 제1회 공연’이란 제목으로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여 크게 주목 받았다.
1960년에는 프랑스 파리국제민속예술제에 참가하는 한국예술단의 「춘향전」 공연 안무와 연출을 맡기도 했다. 1962년 국립무용단의 초대 단장을 맡았고, 1964년에는 서울예술고등학교의 무용과장으로 부임해 후진 양성에 전력을 다했다. 1972년부터 1992년까지 30년 동안 국립발레단의 단장직을 맡았고, 이후 그의 제자들이 바통을 이어받았으며, 한국 발레계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은 거의 그의 제자들이다.
생전에 400여 편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는데, 그 중 「백조의 호수」, 「지젤」, 「지귀의 꿈」, 「처용」, 「왕자호동」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