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출생. 본명 최윤찬(崔潤燦).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소년 가수로 가극단에서 일하다가, 초청강사로 온 무용가 김해랑의 눈에 띄어 1946년 5월 마산의 김해랑무용연구소에 입소하여 전통춤을 섭렵했고, 피난 와 있던 박용호로부터 현대무용을 배웠다. 1950년「삼천만의 꽃다발」이란 영화에 첫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춘향전」, 「시집가는 날」, 「자유결혼」 등 12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1953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진학하여 1954년 최윤찬무용연구소를 개소했고, 한영숙(韓英淑)으로부터 태평무, 승무, 살풀이춤을 배우고, 김천흥(金千興)으로부터 궁중무용인 처용무 등을 배웠다. 1957년에는 동남아 7개국 순회공연단에 합류하여 조용자와 「춘향전」 2인무와 봉산탈춤 등을 공연하였다.
1964년 임성남(林聖男) 안무의 「사신의 독백」과 「허도령」에 출연하고, 이듬해에는 송범(宋范) 안무의 「배신」 등에 출연했으며, 조택원(趙澤元)은 최현을 위해 「신로심불로」를 안무하기도 했다. 이후 「비상」(1974), 「군자무」(1976) 등의 작품을 안무했는데, 그의 대표작이 된 「비상」은 하늘을 훨훨 날고 싶은 새의 의지를 표현한 독무로, 최현 춤의 멋과 흥이 집약된 춤으로 평가되고 있다.
1988년에는 ’88서울예술단의 창단 공연 작품인 「새불」을 안무하고, 동아일보사 창사 70주년 기념공연작품인 「아리랑」을 안무하면서 러시아연방 5개국을 순회공연하기도 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 문화축전 식전행사의 「영고」, 1988년 서울올림픽 폐회식 「안녕」의 총괄 안무를 맡았으며, 이후 「심청전」, 「춘향전」 등을 안무했다.
1990년대에서 2001년까지 「꿈의 춘향」, 「허행초」, 「남색끝동」, 「달의 제사」, 「남천」, 「고풍」, 「비원」, 「비파연」 등 소품 위주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1993년 국립무용단이 재공연한 「군자무」는 매란국죽의 각기 다른 여인상을 정갈하게 담아냈다는 호평을 받았으며, 1994년 12월 춤 입문 50년만의 첫 작품전에서 초연된 그의 독무 「허행초」는 최현 춤의 득도의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았다.
한편, 무용교육자로서 서울예술고등학교 무용과장(1965년), 국립국악원무용단 안무자(1978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1979년)을 맡았으며, 1981년부터 85년까지 서울예술전문대학 무용과 교수직에 이어 이화여자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 출강하였다. 특히 무용계에서는 예원학교와 서울예술고등학교에 30년 동안 재직하면서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1995년 국립무용단 단장을 맡았고, 세계무용연맹 한국본부의 2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생전에 100여 편의 작품을 안무하고 춤춘 최현은 조택원, 송범으로 이어지는 신무용의 대가로, 남성춤의 정체성을 굳건하게 지킨 무용가란 평가를 받고 있다.
제4회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으며, 국민훈장 화관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