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황기로 초서는 2점인데, 이군옥시(보물, 2010년 지정)와 차운시(보물, 2010년 지정)로 되어 있다. 이군옥시는 필사본, 축장, 1축, 99.5×52.6㎝. 차운시는 필사본, 액장, 1점, 25.7×109.8㎝.
황기로가 쓴 2점의 초서 필적으로, 하나는 황기로가 당나라 이군옥(李羣玉)의 오언율시를 쓴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같은 시기에 시로 명망이 있던 문사들의 시축(詩軸)을 본 뒤 직접 차운(次韻)하여 지은 시(詩)이다.
황기로의 본관은 덕산(德山), 자는 태수(鮐叟), 호는 고산(孤山) 또는 매학정(梅鶴亭)이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천재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매학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취묵(醉墨)과 감상(甘觴)의 세월을 살았다. 이황과 조식의 문인인 황준량(黃俊良)과 이정(李楨), 이증영(李增榮, ?∼1563) 등과도 활발하게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은 것을 알 수 있다.
황기로는 낙동강 지류 보천탄(寶泉灘) 가에 매학정을 짓고 살았던 처사(處士)로서 회소(懷素)의 방일한 초서를 애호하고 또 그를 바탕으로 독특한 서풍을 보인 명나라 동해옹(東海翁) 장필(張弼, 1425∼1487)을 따랐다. 이 필적은 황기로의 사위이자 신사임당의 아들인 이우(李瑀)의 후손 이장희(李璋憙, 1909∼1998)가 수집한 것으로 그의 장손에 의해 기증되었다.
「황기로 초서 차운시」는 말미의 관지에, “축(軸) 중에 청천(菁川: 유희령, 1480∼1552), 영천(靈川: 신잠, 1491∼1554), 귤옹(橘翁: 윤구, 1495∼?), 송강(松江: 조징, 1511∼1574), 서하(西河, 미상)의 시가 있어 몇 번씩 반복함에 그칠 수 없어 이에 시를 짓는다.”라고 씌어 있어 차운시를 쓰게 된 제작 동기를 알 수 있다. 또한 “고산 매학정 주인이 쓰다[孤山梅鶴亭主人書].”라고 한 점에서 황기로의 필적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기록으로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명필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하서집(河西集)』 권6에 황기로가 본 시축에 언급되어 있는 동일한 인물들의 시가 씌어 있는 시축(詩軸)을 보고 김인후가 직접 차운한 시가 실려 있어 당시의 명망 있는 문사와 명필들이 동일한 시축을 서로 돌려보며 시교(詩交)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필적은 지금의 소장자가 입수할 때 가로로 긴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던 것을 액자로 개장한 것이다. 오랜 세월에도 글씨가 손상되지 않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또 소장자의 인장으로 추정되는 “백봉(白峯)”이라고 새긴 솥 모양 인장〔鼎形印〕이 다섯 군데 찍혀 있다. 말미에 “태사지후 충신지손(太師之后 忠臣之孫)”이라고 새긴 장방형의 인장이 찍혀 있는데, ‘백봉’은 안동김씨 김수빈(金壽賓, 1626∼?)의 호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그의 선조인 안동김씨 김선평(金宣平)이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후손인 그가 이러한 인문(印文)을 쓰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황기로 초서 이군옥시」의 필적은 가느다란 필선과 경쾌한 붓놀림, 그리고 붓이 끊이지 않고 유려하고 활달한 운필에서 회소와 장필의 서법을 기반으로 자가적 초서풍을 구현했음을 보여준다. 하단 부분에 몇 글자 탈락되었으나 황기로의 묵적 가운데 대폭(大幅)에 속하는 필적으로 그의 특징이 잘 나타난 대표작이다. 뿐만 아니라 초서 필적은 규모는 작지만 필획이 매우 간정(簡淨)하고 운필이 활달하여 황기로 묵적 가운데 뛰어난 기량을 보인 수작(秀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