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강이(剛而), 호는 구암(龜巖). 이맹주(李孟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이번(李以蕃)이다.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이담(李湛)이며, 어머니는 진주 정씨(晉州鄭氏)이다.
1536년(중종 31) 진사로 별시 문과에 장원,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정랑을 거친 뒤 연로한 부모 봉양을 위해 경상도 선산부사로 나갔다가 1552년(명종 7) 사성, 이듬 해 청주목사를 지냈다. 이 때 선정을 베풀고 효행이 뛰어나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되었다.
1555년 왜구가 호남성에 침입하자, 군기를 엄정히 해 구원하러 가자 그 위엄에 눌려 왜구들이 도망하였다. 1559년 우부승지·형조참의·좌부승지 등을 거쳐 이듬해 병조참의·대사간·호조참의·예조참의를 지내고, 경주부윤으로 나가 옛 신라의 열왕묘(列王墓)를 보수하고, 서악정사(西嶽精舍)를 세워 후진 교육에 힘썼다.
1563년 중앙의 요직에 잠시 있은 뒤 다시 전라도 순천부사로 나가 갑자사화 때 사사된 김굉필(金宏弼)을 위해 경현당(景賢堂)을 건립, 김굉필을 제사하게 하였다. 1568년(선조 1)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고향에 구암정사(龜巖精舍)를 지어 동쪽에는 거경재(居敬齋), 서쪽에는 명의재(明義齋)를 만들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어릴 때 송인수(宋麟壽)로부터 배우고 성장한 뒤에는 이황(李滉)과 교유하였다. 성리학에 밝았다 한다. 사천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구암문집』· 『성리유편(性理遺編)』·『경현록(景賢錄)』·『논상례(論喪禮)』·『한훤보록(寒暄譜錄)』·『열성어제(列聖御製)』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