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산(德山), 자는 태수(鮐叟), 호는 고산(孤山) 또는 매학정(梅鶴亭). ‘초성(草聖)’이라 불릴 정도로 초서에 능하였던 조선 중기의 서예가이다.
황기로의 조부는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낸 황필(黃㻶), 부친은 빙고 별좌(氷庫別坐)를 지낸 황이옥(黃李沃), 모친은 초계 정씨(草溪鄭氏)로 현감을 지낸 정내필(鄭來弼)의 딸이다. 황기로는 청송 심씨 심흥원(沈興源)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일찍 작고한 듯 슬하에 자식이 없었고, 후취로 문화 유씨 유혼(柳混)의 딸을 맞아 1녀를 두었다.
그의 딸은 율곡 이이(李珥)의 아우이자 명서가인 옥산(玉山) 이우(李瑀)와 혼인하였다. 황기로의 유묵은 딸과 혼인 관계를 맺은 덕수 이씨(德水李氏) 옥산공파 종손댁에 전해지다가 2007년에 강릉시 오죽헌 · 시립박물관에 일괄 기증되었다.
황기로의 몰년을 알려 주는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그가 남명 조식(曺植) 문하의 동문 박제현(朴齊賢)을 위해 1575년에 제문을 써 주었고, 권호문(權好文)이 1579년에 이우의 글씨를 보고 고인이 된 황기로의 필적과 닮았다고 언급한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그의 몰년은 1575년에서 1579년 사이로 추정된다.
황기로는 1534년(중종 29) 1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부친 황이옥이 남곤(南袞) · 심정(沈貞)의 사주를 받아 신진 사림의 거두 조광조(趙光祖)를 처단할 것을 주장하다 사판(士版)에서 삭제된 일로 인해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조부 황필의 유지를 받들어 고향 선산(善山)에 위치한 고산(孤山) 언덕에 매학정(梅鶴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글씨와 술로 일생을 보냈다. ‘고산’과 ‘매학정’이라는 아호는 중국 서호(西湖) 고산(孤山)에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매처학자(梅妻鶴子)’로 불렸던 북송(北宋)의 은둔 시인 임포(林逋)의 처사적 삶을 동경한 데서 온 것이다.
황기로는 ‘초성’이라 불릴 정도로 초서에 능하였고, 특히 술과 관련된 일화가 많아 취흥을 빌려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종종 전해진다. 이는 당(唐)의 장욱(張旭)과 회소(懷素) 등 광초(狂草)로 불린 초서 명가들의 자유롭고 방일(放逸)한 태도와 일치하는 것으로, 실제 그의 글씨에 장욱 · 회소와 명대의 초서 명가 장필(張弼)의 서풍이 적극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들 간의 유사성과 영향 관계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전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회소의 글씨를 찬미한 이백(李白) 시를 1549년에 쓴 「초서가행(草書歌行)」이 석각본으로 간행되어 여러 곳에 전해지고 있고, 필적을 새긴 원석도 강릉시 오죽헌 · 시립박물관에 기증되어 있다. 이 밖에 『동국명필(東國名筆)』 · 『대동서법(大東書法)』 등의 법첩에도 그의 필적이 실려 있다.
그의 초서풍은 사위 이우를 포함하여 이산해(李山海), 이지정(李志定) 등에게 전해지며 조선 중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세속을 멀리하며 유유자적 살다 간 처사로서의 삶과 함께 당대 및 후대인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