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권21, 24는 송나라 화엄학승 정원(淨源, 1011~1088)이 쓴 80권본 『화엄경』의 본문을 나누고, 그 아래에 80권본 『화엄경』에 대한 징관(澄觀, 738~839)의 주석서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의 해당 부분을 실은 총 120권의 주석서 중 제 21·24권에 해당한다. 보물 제1128호이다.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권21, 24는 송나라 화엄학승인 정원(淨源, 10111088)이 쓴 80권본 『화엄경(華嚴經)』의 본문을 나누고, 그 아래에 80권본 『화엄경』에 대한 징관(澄觀, 738839)의 주석서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의 해당 부분을 실은 총 120권의 주석서 중 제 21 · 24권에 해당한다. 보물 제1128호이다.
참고로 80권본 『화엄경』은 당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국호를 주(周)로 정했을 때 한역한 것에서 유래하여 '주본(周本) 『화엄경』'이라 칭하기도 한다. 또한 모두 80권으로 이루어져 있어 ‘80권본 『화엄경』’ 또는 '『팔십화엄경』'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80권본 『화엄경』은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359429)가 418420년에 번역한 진본(晉本) 『화엄경』에 이어 새로 번역된 것이다. 이에 대한 주석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징관이 쓴 『대방광불화엄경소』이다.
대각국사 의천은 송나라 유학 시절 당시 화엄학의 대가인 정원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의천은 송의 혜인원에 머무는 동안 정원이 엮은 『대방광불화엄경소』 1질 120권을 정원 본인으로부터 기증받았다. 의천은 귀국하기 전에 그 전질(全帙)의 판각을 항저우[杭州]의 각수 엄명(嚴明) 등에게 주문하였다. 이후 정원은 1087년(선종 4) 3월 송나라 선상(船商)인 서전(徐戩) 등을 통해 모두 2,900여 판에 이르는 목판(木板)을 고려의 의천에게 전달하였다.
1424년(세종 6), 대장경판을 달라는 일본에 끈질긴 요청에 이 목판을 대신 주어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목판들은 일본 교토 쇼코쿠사[相國寺]에 비치되었으나 후에 화재로 전부 소실되었다. 따라서 이 목판은 불교를 통해 동양 3국이 문화적으로 교류하였음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대방광불화엄경소』 권68은 14세기에 개성(開城)에서 『대방광불화엄경소』 120권본 전체 목판을 인출(印出)한 것 중에서 제 21 · 24권을 각각 1권 1첩(帖)의 절첩본(折帖本)으로 만든 것이다. 이 책은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줄여서 『화엄경(華嚴經)』이라고 약칭(略稱)한다. 이 『화엄경』의 중심 사상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不二]’라는 것이다. 『화엄경』은 화엄종(華嚴宗)의 근본 경전으로 『법화경(法華經)』과 함께 한국의 불교 사상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의천의 요청으로 중국 송나라에서 판각되어 1087년 경에 고려에 수입된 『화엄경소』 120권 목판을 보통 '주화엄경판(注華嚴經板)'으로 부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일본이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재조대장경』 목판을 달라고 조선 조정에 억지 부리며 요청했을 때, 세종은 1424년(세종 6) ‘팔만대장경판’ 대신 이 '주화엄경판'을 일본 사신에게 주어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일본은 해인사에 있는 고려재조대장경판을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욕구가 매우 강렬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유교 국가였지만 전통적인 불교 유산을 소중히 여겼고 그로 인해 고려대장경판은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 송나라에서 판각된 주화엄경판은 고려시대까지 잘 보존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세종 때 선린 외교(善隣外交)의 측면에서 이 주화엄경판이 일본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주화엄경판은 불경 목판을 통해 한(韓) · 중(中) · 일(日) 삼국이 문화적으로 교류한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나아가 이 주화엄경판은 한 · 중 · 일 삼국의 문화 교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하는 그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