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추강(秋岡)이다. 충청북도 음성 출신으로 고향에서 김규진(金圭鎭)의 화집을 구해 사군자를 독학하다 1932년 상경하여 김규진 문하에 입문하였다. 김규진 사후인 1933년 초여름 이상범(李象範)의 청전화숙(靑田畵塾)으로 옮기면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이해에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여성화가로 나혜석(羅蕙錫), 정찬영(鄭粲英)과 함께 주목받았다. 또한 1933년부터 1939년 사이에 『동아일보』의 신년 휘호로 「산수」, 「화훼」, 「묵죽」이 실린 것으로 보아 여성화가로서 화명이 높아 주목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녀는 1933년부터 1935년까지 서화협회전에 출품함과 동시에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출품하여 1934년 제13회에는 「총죽(叢竹)」과 「산수」, 1935년 제14회에는 「귀초(歸樵)」와 「신록(新綠)」, 1937년 제16회에는 「추교(秋郊)」, 1938년 제17회에는 「농촌을 본대로(田舍を見た儘)」, 1940년 제19회에는 「우제(雨霽)」가 각각 입선하였다. 1937년 12월 성신여학교(誠信女學校)에서 부인들의 취미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설치한 서화부에서 스승 이상범은 심사를 담당하고, 그녀는 학생들에게 직접 그림을 가르쳤다. 1942년 제2회 청전화숙전에 참여하였으며, 그녀의 화풍은 1938년 김복진(金復鎭)이 지적한 것처럼 이상범의 제자인 박원수(朴元壽), 배렴(裵廉), 심은택(沈銀擇) 등과 함께 스승이 개척한 실경산수화풍을 안일하게 따르는 천편일률적인 양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국전쟁 중에 임용련, 윤승욱과 납북되는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