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충주(忠州), 호는 춘초(春草)이다.1899년 2월, 서울 가회동에서 지운영(池雲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계산(桂山)소학교와 오성(五星)중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17년 서화미술회에 입학하면서 그림을 시작하였고, 1919년부터 조석진(趙錫晋)의 문하생으로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게 되면서 아버지로부터 한학과 서화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 입선한 「미인침선(美人針線)」은 조선 황실에서 구입하였으며,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에는 「삼산운경(杉山雲景)」, 1926년 제5회에는 「야인효행(野人曉行)」, 1927년 제6회에는 「무수옹(無愁翁)」, 1928년 제7회에는 「중춘산촌(仲春山村)」이 각각 입선하였다.이들 작품에는 김은호(金殷鎬)에 의해 주도된 미인화풍과 이상범(李象範)이 개척한 실경산수화풍이 들어있다. 이러한 점은 그가 처음에는 화단의 주요 경향을 따랐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현재 전하는 그의 산수화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독특한 소미점(小米點)에서는 아버지 지운영의 영향도 엿보인다. 또한 『조선일보』에서 1924년 11월부터 독자들의 투고 만화를 선정 소개하는 ‘철필사진’이란 고정란에 그의 만화 「쥐띠와 개띠의 대화」가 처음 당선된 것에서도 예술적 재능을 엿볼 수 있다. 1927년 1월 3일 『동아일보』에 그의 토끼 그림이 실렸으며, 같은 해 열린 제7회 서화협회전에도 출품하였다. 일제의 식민탄압이 심해지자 붓을 내려놓고 이름을 이대창(李大昌)이라 바꾸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예술적 재능을 숨기지 못했던 듯 1935년 제14회와 1936년 제15회 서화협회전에 출품하였고, 1938년 제18회부터 1940년 제20회까지 조선미술전람회의 공예부에 3년 연속 입선하는 특이한 이력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 무렵 가회동에 경성칠공소(京城漆工所)를 개설해 동인들과 활동하였으며, 나전칠기 분야의 전승자였던 김봉룡(金奉龍)도 동인으로 활동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11월 열린 제1회 조선미술가협회 전람회에 「정유원(庭遊園)」을 출품하였으며, 공주에서의 광산 개발 실패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다시 그림을 그리면서 1977년 3월 신문회관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고, 다음해에는 미도파백화점에서 팔순기념 초대전이 열렸다. 현전작품에는 「산수도」(서울역사박물관), 「추강어은도(秋江漁隱圖)」와 「화조도」(고려대학교박물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