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성중(聲中), 호는 옥람(玉藍)이다.
강원도 동해시 부곡동에서 월계(月溪) 한승원(韓承源)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춘사(春史)한진유(韓鎭裕)에게 한학을 배운 다음 시서화를 독학으로 터득하였다. 1892년 14세 때 강릉 최씨와 결혼하였으나 사별한 다음 해인 1916년 강릉 김씨와 재혼해 1남 5녀를 두었다.
1911년 평양에서 열린 현판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부벽루(浮碧樓)의 뒷면 현판을 쓰게 되면서 강원도를 비롯한 함경도, 평안도 등지에 서예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24년에는 동해시 북평에 중건된 ‘만경대(萬景臺)’의 현판을 쓰기도 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 북한지역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면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그는 중년 이후 전․예․해․행․초서에 통달하였으며, 커다란 글씨의 해서와 행서에서 한석봉체(韓石峯體)를 근간으로 고졸한 서풍을 완성하였다. 더불어 사군자 방면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발휘하였다. 1942년 64세 무렵 고향으로 돌아와 홍락섭(洪樂燮), 심지황(沈之潢) 등과 교유하면서 최홍희(崔泓熙) 등 제자를 배출하며 영동지역 서예계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또한 집안에 서책이 많아 서재의 이름을 만권재(萬卷齋) 또는 만권당(萬卷堂)이라 불렀다. 사망한 지 3년이 지난 1954년 제자들이 강릉 경포대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언덕에 그의 기념비를 세웠으며, 『옥람시고(玉藍詩稿)』 1책이 현전하고 있다. 현재 북한지역에 그의 유묵이 다수 남아 있으며, 관동대학교박물관과 삼척시립박물관 등에 일부가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