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폭동은 흑인 로드니 킹을 집단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1992년 4월 29일 재판에서 무죄로 풀려난 것을 계기로 촉발된 인종폭동이다. 흑인 시위대가 한인타운에서 약탈과 방화를 일삼아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면서 한인과 흑인 간의 갈등이 부각되기도 했다. 4월 29일 시작하여 5월 3일에야 진정국면으로 들어간 LA폭동은 사망자 53명, 부상자 4천명이라는 인명피해와 함께 7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재산피해를 남겼다. 재산피해의 약 40%가 한인업소가 입은 피해였다. 미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보여준 폭동으로, 소수민족 연대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LA폭동은 흑인인 로드니 킹을 백인 경찰들이 집단 구타한 사건이 도화선이었지만 폭동이 발생하자 흑인 시위대가 한인타운으로 몰려가 약탈과 방화를 일삼으면서 한인 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사건이다.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당시 미국 사법당국과 지역 언론들은 무자비한 경찰과 빈부격차, 인종차별 등 미국 사회에 잠복한 근본문제보다는 한흑(韓黑)갈등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한인들이 입은 정신적 상처는 물질적 피해 못지않게 컸다는 점이다.
4월 29일 시작하여 5월 3일에야 진정국면으로 들어간 LA폭동은 사망자 53명, 부상자 4천명이라는 인명피해와 함께 7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재산피해(이중 약 40%가 한인업소들이 입은 피해)를 남기며 미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보여준 대표적 폭동으로 기억되고 있다.
LA폭동의 최대 피해자가 한인 이민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문제를 한흑갈등이라는 측면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한인 이민자들은 정착 초기 미국 노동시장에서의 불리함을 자영업과 근면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흑인 및 히스패닉과 같은 소수민족들과의 갈등을 빚었다.
당시 미국 사회에는 인종적 편견과 흑백갈등이 만연해 있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로드니 킹 사건은 흑인사회를 자극함으로서 인종간의 갈등을 더욱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불행하게도 로드니 킹 구타사건이 발발한 1991년의 비슷한 시점에 한인마켓에서 흑인소녀를 한인주인이 살해 한 ‘두순자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두 사건은 1992년 폭동이 일어날 시점까지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그런데 폭동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언론은 1년 전인 1991년 3월 16일 흑인 빈민지역인 남부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이른바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한국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갈등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다시 말해 이는 흑인들의 공격의 화살을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도록 작용하였던 것이다. 특히 미국 내 KABC방송은 한인들을 한흑갈등의 피해자가 아닌 원인제공자인 것처럼 보도했고, 이 밖의 여러 방송들도 흑인 소녀 나타샤 할린즈가 두순자에게 총을 맞는 장면을 여러 차례 방영했다.
이에 더하여 코리아타운이 백인 거주지와 흑인밀집지역 사이에 끼어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이 역시 백인들을 향한 흑인들의 분노를 한인들에게 쉽게 돌리도록 작용했다. 즉 백인 거주지와 흑인 거주지 사이에 위치한 한인 타운은 인종폭동의 피해를 흡수할 완충지대로 이용될 여지를 안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폭동이 진행되는 동안 부유한 백인거주지역인 웨스트우드(Westwood)나 비벌리힐스(Beverly Hills)에는 경찰력이 일찍 배치되었으나, 정작 흑인가에 가까운 한인타운에서는 경찰들이 초기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의심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치안을 책임진 당국은 흑인들이 그들의 분노와 갈등을 한인들을 향해 표출하도록 그대로 방치한 셈이 되었다.
LA폭동의 주요 경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991년 3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몇 명의 교통경찰관이 과속운전을 한 흑인청년 로드니 킹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 뉴스에 방영되었다.
○ 흑인인권이 심각히 침해되었다고 분개하는 가운데, 1년 후인 1992년 전국적인 시선이 집중된 상태에서 열린 재판에서 구속된 경찰관들에게 12명의 배심원이 무죄평결을 내렸다. 이러한 판결에 분개한 빈민층의 흑인사회(라틴계도 상당수 포함)가 폭발, 시위로 번졌고 급기야는 폭동으로 비화되었다.
○ 이 때가 1992년 4월 29일 오후 3시였고 평결이 내려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경청하던 LA 남부지역의 흑인들이 거리를 뛰쳐나와 마침 노르만디와 플로렌스 교차로를 지나가는 백인 트럭운전자를 끌어내려 구타하기 시작했다.
○ 헬리콥터에서 생중계하는 TV를 통해 이 장면을 본 흑인들이 신호를 받은 양 일제히 주변의 주유소와 가게를 약탈하기 시작하여, 순식간에 LA 한인타운을 비롯한 도시의 대부분이 폭도들에게 약탈당하고 불타는 폭동이 일어났고, 폭동은 5월 4일에 가서야 완전히 진정되었다.
LA폭동은 한인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안겼다. 약 2,300개의 한인 업소가 약탈당했거나 전소되어 재산 피해액이 4억 달러에 달했으나, 피해를 당한 한인들의 대부분은 지방정부나 연방정부로부터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를 통하여 1.5세와 2세들은 소수민족으로서 그들의 부모세대가 겪는 고통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였고, 언어문제와 정치력 부재 때문에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부모세대를 도울 수 있는 젊은 세대를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폭동 직후 5월1일 코리아타운 중심부에 주로 젊은 세대 중심으로 1,000명이 자발적으로 모여 평화집회가 열었고, 그 다음날인 5월2일에는 1.5세와 2세들이 평화대행진을 주도하고 1세들이 적극 호응함으로써 하루 만에 무려 10만 명의 대인파가 코리아타운 한 복판에 있는 아드모어(Ardmore) 공원에 집결하는 기적을 연출하였다.
LA폭동은 재미한인들의 권익은 한인 스스로가 보호해야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미주동포사회에서도 소수민족운동의 성격을 띤 권익운동과 정치력 신장운동이 점차 본격화 되었다.
특히 당시 부모 1세대들이 흑인들에게 당하고도 주류사회에 대하여 강력하게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본 1.5세와 2세들이 한인권익운동에 적극 나서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90년대 이후 한인 1.5세와 2세들이 중심이 된 권익운동, 민권운동, 소수민족 연대운동이 한인사회의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