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의 아들 김익태가 1982년 창원 소답리의 고향집에 내려가 다락방을 정리하다 우연히 「소녀상」과 함께 이 「조모상」을 발견하였다. 이후 서울로 가져와 병석에 있던 김종영으로부터 직접 작품의 내력을 확인하였다. 작가는 이 작품을 1936년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1학년 여름방학에 고향에 들렀을 때 자신의 할머니를 조각한 것으로 기억하였다. 실지로 당시 작가의 조모는 생존해 있었을 것이다.
얼굴과 머리 그리고 목과 쇄골 부분까지 조각한 흉상이다. 다소 세부적인 묘사에 치중하여 전체적인 양감이나 당당함은 적은 편이지만 깊은 눈매와 코에서 입술로 이어지는 얼굴의 특징이 자신 있게 모델링되어 그 기량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머리의 쪽진 모습을 세밀히 묘사하였는데, 머리카락을 올 단위로 표현하여 세밀한 면이 돋보인다. 표면에는 피부색으로 갈색 안료가 채색되어 작가가 대상의 실제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석고는 석고물을 개어 발라 올린 듯 아주 얇게 떠진 것을 후에 보강하기 위해 내부에 석고를 거칠게 더 발라넣은 것으로 보인다. 1㎝ 이하로 소조에서부터 얇은 석고 떠내기 방식은 도쿄미술학교에서 배운 기법으로서 근대기 석고 제작방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김종영은 한국 현대 추상조각의 선구자로서, 초기 구상시기의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특히 다른 조각가들과는 달리 유학시절 일본의 전람회나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아 그의 도쿄미술학교 재학 중의 작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견된 「조모상」은 작가의 학습기를 알려주는 작품으로서 자료적인 가치를 지닌다.
또,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한국작가의 작품들은 두상 계열의 작품이 많다. 하지만 그 유존례는 매우 적은데, 근대기 한국조각의 주요한 흐름인 두상조각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 주요한 자료이다. 또한 근대기 석고제작의 기법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