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조각가 김종영의 아들 김익태가 1982년 창원 소답리의 고향집 다락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하였다. 김익태는 함께 발견된 「조모상」과 이 작품을 서울로 가져와 당시 병석에 있던 작가 김종영에게 보여주었다. 그 자리에서 「조모상」은 도쿄미술대학(東京美術大學) 1학년 때인 1936년에 제작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김종영으로부터 직접 작품의 내력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소녀상」은 이때 함께 제작된 작품이 아닌데, 신문에 1936년에 제작된 것으로 소개되어 알려졌다. 한편에서는 이 작품이 1950년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임하던 중 학생들에게 석고 소조를 가르치기 위해 제작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소녀상」의 석고를 다루는 방식은 「조모상」보다 조금 두터운 부분이 있고 보관상태도 양호하다. 그리고 인물을 모델링하는 기량이 「조모상」이 세부에 집중하는 데 비해 「소녀상」은 크게 모델링을 구현하고 있어서 1950년대 초반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소녀상」은 두 갈래로 머리를 땋아 내렸는데 한쪽이 약간 구부러져 몸체와 사이에 공간이 생겨 전체적으로 양감이 강화되었다. 머리카락은 단순하게 처리되었다. 약간 고개를 아래로 숙여 소녀의 조용하면서도 깊은 사색을 즐기는 의식세계를 보여준다. 목에 밭게 옷깃이 양쪽으로 표현되었고 어깨는 생략하고 가슴까지 표현된 흉상이다. 석고상은 점토로 형태를 만들 때 작가의 손과 헤라(칠을 벗겨 내거나 반죽을 얇게 바르기 위해 사용하는 주걱 모양의 도구)가 지나간 자리를 보여주는데, 부드러운 머리와 얼굴에 비해 옷은 짧고 반복적인 두드림 자국을 통해 피부와 다른 직물의 질감을 느낄 수 있다.
추상조각가임에도 인체조각이나 구상조각에 대한 김종영의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1940, 50년대 유존작이 적은 조각 중에서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여 당대 조각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