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광명맹아학교 ()

단체
1935년 맹학생과 농아학생을 위하여 평양에 설립되었던 특수학교.
이칭
이칭
평양맹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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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35년 맹학생과 농아학생을 위하여 평양에 설립되었던 특수학교.
개설

1931년부터 평양 남문 밖 교회에 시무 중이던 이창호 목사가 맹농아자들의 교육을 위하여 모펫(Moffet) 목사의 도움으로 마포삼열기념관에 남자 맹인 15명을 수용하고, 1935년 4월 1일 평양맹아원으로 출범한 특수학교이다.

연원 및 변천

당시 평양에는 미국북감리교 의료선교사인 홀(Hall, R. S.) 여사가 설립한 평양맹아학교(平壤盲啞學校)가 있었지만, 맹여학생들만을 교육하였기 때문에 남자 맹인들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제생원 맹아부 제14회 졸업생인 정삼출은 맹학교를 졸업한 김명각, 이봉오, 홍재석, 윤학배, 정인관, 전유직 등과 함께 남자 맹인 5명을 모아 안마술(按摩術)과 침술(鍼術)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정삼출은 맹아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이창호 목사에게 맹학생의 교육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창호 목사는 평안도 도제직회에서 맹아학교를 설립할 것을 결의하고 모펫 목사에게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창호 목사는 개원에 필요한 준비를 갖추고 1935년 4월 1일 농아교육을 추가하여 평양맹아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기능과 역할

평양맹아원은 맹부 6학급, 농아부 6학급으로 초등학교 6년제 교육을 실시하였다. 교육과정으로는 일반학교에 준하되 직업교육에 강조점을 두어 맹부의 직업교육은 안마술, 침술, 구술(灸術)이었고, 농아부는 목공과 양재이었다.

이창호 교장은 맹부의 직업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 동경맹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전태환을 교사로 채용하여 안마술, 침술, 구술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당시 안마사, 침사, 구사 자격증을 소지한 교사를 확보하지 못한 학교의 졸업생들에게는 무시험으로 안마사, 침사, 구사 자격증을 주지 않고 어려운 자격시험을 친 후 합격한 학생에게만 자격증을 주었다.

그러나 1938년에 전태환이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발령받아 전출감으로써 어려움을 겪게 되었지만, 같은 해에 대동강변 대타령 지역에 2,000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이층 교사를 신축하였다.

1942년에는 학교의 인가를 받아 평양광명맹아학교(平壤光明盲啞學校)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43년에 100여 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를 짓고 교육 시설도 확충하였다.

그 후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정권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48년 5월 이창호 교장을 축출하고 학교를 폐교하였으며, 일부의 학생과 교사를 원산맹학교로 보냈다.

의의와 평가

당시 평양맹아학교는 미국 감리교의 해외여성선교회가 후원하였기 때문에 남자 맹인들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평양광명맹아학교의 설립으로 남자 맹인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평양맹아학교는 미국의 선교사가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제생원 맹아부는 조선총독부가 설립하여 운영했으나, 평양광명맹아학교는 우리나라 사람에 의하여 설립∙운영된 특수학교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평양노회사』(박용규, 평양노회, 1990)
「수난기의 특수교육」(안병즙, 『한국 특수교육 백년사』, 도서출판 특수교육,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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