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통도사 역대고승 영정 ( )

양산 통도사 역대고승영정 중 월허당 계청 영정
양산 통도사 역대고승영정 중 월허당 계청 영정
회화
유물
문화재
경상남도 양산시 통도사에 봉안된 조선 후기 승려들의 초상화.
이칭
이칭
양산 통도사 역대 고승 진영, 양산 통도사 역대 고승 초상화
시도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양산 통도사 역대고승 진영(梁山通度寺所藏歷代高僧影幀)
지정기관
경상남도
종목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유산(2006년 11월 02일 지정)
소재지
경상남도 양산시 통도사로 108 (하북면, 통도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통도사에 봉안된 조선 후기 승려들의 초상화.
개설

2006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양산 통도사에는 조선 후기 승려 진영이 약 90점이 남아 있는데 그 중 62점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상로전의 삼성각(三聖閣), 중로전의 해장보각(海藏寶閣), 그리고 하로전의 진영당(眞影堂), 부속 암자 등 여러 곳에 흩어져 봉안되어 있다. 이와 같이 많은 진영의 사찰 봉안은 조선 후기 진영 제작이 활발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통도사 진영들은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 제작되었는데, 특히 19세기에 활동했던 옥인(玉仁)과 의운 자우(意雲慈友)가 제작한 진영들은 조선 후기 경상도 지역의 승려 진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

진영의 봉안 현황

해장보각은 삼문인 개산조당과 연결되어 조사당의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1727년(영조 3)에 창건되었으며 1900년(광무 4)에 중창되었다. 해장보각 중앙에 자장율사(慈藏律師)의 진영을 봉안하고 좌우에 장경(藏經)을 보관하고 있다.

1870년(고종 7)에 창건된 삼성각은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의 진영을 중앙에 봉안하고 좌우에 칠성도(七星圖)와 독성도(獨聖圖)를 모시고 있어, 지공 · 나옹 · 무학의 영각으로서 기능한다. 산신(山神) · 칠성(七星) · 독성(獨聖)을 봉안하는 다른 사찰의 삼성각과는 봉안된 존격이 다른 것이 통도사 삼성각의 특징이다.

진영당은 임진왜란에서 공로를 세운 휴정(休靜), 유정(惟政), 영규(靈圭)의 진영과 함께 사찰의 주지 및 대덕의 진영 등 약 80점이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통도사에 진영당이 처음 설치된 때는 알 수 없지만 1705년(숙종 3)과 1843년(헌종 9) 두 번에 걸쳐 중창되었다. 진영당 진영들 중 제작 시기가 빠른 것은 18세기 후반으로 사찰의 역사가 장구함에도 진영의 제작 시기는 늦은 편이다. 그 원인은 1756년 통도사에 큰 불이 났을 때 건물과 함께 진영도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덕 진영 중에는 화재 이후 1843년 진영당을 중창할 때 참여한 인물들의 것이 다수 발견된다.

내용

통도사 진영들 속 승려들의 활동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근대에 이르지만, 현존하는 진영들 중 제작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은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다. 바로 「해송 관준 진영(海松寬俊眞影)」으로, 화면 오른쪽에 쓰인 ‘해송대선사관준진(海松堂大禪師寬俊眞)’이라는 영제를 통해서 화면의 주인공을 파악할 수 있다. 통도사에는 해송 관준의 법맥에서 직계 선조인 휴정, 지안, 체정, 도주, 궤붕의 진영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는 같은 법맥을 계승한 승려들이 같은 사찰에 지속적으로 거주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해송 관준 진영」의 제작 시기는 화면 아래의 붉은 칸에 묵서로 ‘건륭오십일년병오윤칠월조성(乾隆五十一年丙午閏七月造成)’이라 쓰여 있어 1786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송 관준의 진영이 선조들의 진영보다 제작 시기가 오래된 것은 진영의 봉안 관습에 원인이 있다. 즉 사찰에서는 진영이 퇴색되면 구본을 베껴 새로운 진영을 제작하여 봉안하였기 때문이다. 1843년 가산월하(伽山月荷) 계오(戒悟)가 쓴 「통도사영자전중창기(通度寺影子殿重創記)」에 따르면 통도사 진영당에 봉안한 여러 진영의 채색이 탈색되고 기울어진 것이 매우 심해 구본에 의거하여 진영을 새롭게 조성하여 봉안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화면 속 해송당 관준은 녹색 계열의 장삼 위에 가사를 입고 앞을 응시하며 앉아 있는 옆모습을 보여준다. 손에 들고 있는 염주와 주장자는 조선 후기 진영에서 흔히 나타나는 승려의 수행 도구들이다. 해송당의 오른편 뒤로는 공중에 떠 있는 경상이 보이는데 그 위에는 형태 묘사가 어색한 녹색 표지의 경책이 있다. 그리고 해송당이 앉아 있는 무늬가 있는 돗자리는 화면 하단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화면 전체가 상단과 하단으로 뚜렷이 둘로 구분된 것은 아니다. 18세기 말부터는 화면의 이단 구분이 뚜렷이 나타나 19세기의 진영 구도의 전형으로 정착된다.

그밖에 복식의 형태와 지물을 들고 있는 자세에서도 19세기에 제작된 통도사 진영들과 차이점이 있다. 해송당이 입고 있는 녹색 계열의 장삼은 굵은 허리띠를 이용해 앞섶을 여미는 형태이다. 이와 같은 장삼의 여밈 방식은 19세기에 제작된 통도사의 여러 진영 속 인물이 장삼의 앞섶을 고름으로 여민 것과 다르다. 가사의 형태도 해송당의 왼쪽 몸을 완전히 가리고 있을 뿐 아니라, 가사의 윗부분은 일부 접힌 상태로 해송당의 어깨를 덮고 있으며 가사를 고정한 끈은 길지 않다. 19세기 진영에는 주로 색색의 긴 끈이 달린 가사가 자주 나타나므로 해송당 관준 진영은 19세기에 제작된 전형적인 진영들과 차이를 보인다. 「해송 관준 진영」에 보이는 복식은 19세기 진영들보다는 1743년 선암사에서 제작된 「동악 재인 진영(東岳 在仁 眞影)」 가까운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물로 들고 있는 염주의 형태나 화면을 가로 질러 주장자를 쥐고 있는 모습도 아직 정형화되지 않은 형식을 보여준다.

현재 통도사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진영은 19세기에 제작된 것이다. 19세기에 제작된 경상도 지역 진영들은 대부분 화면이 상단과 하단으로 구분되고 하단에 돗자리가 표현된다. 그리고 승려는 염주와 주장자를 들고 앉아 있으며, 고름이 있는 장삼과 긴 가사 끈이 달린 가사를 입고 있다. 이러한 진영의 형식은 당시 승려의 주거 양식과 수행, 그리고 의복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화사들은 정해진 틀 안에서 화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주인공이 돋보이도록 본을 만들고, 자신이 창안한 본을 여러 승려들의 진영을 제작할 때 반복적으로 활용했다.

한편 화기를 통해서 진영을 그린 화사들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옥인(玉仁)과 자우(慈友)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19세기 전반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인 인물은 옥인이다. 옥인은 1799년 「환성 지안 진영(喚醒志安眞影)」을 제작한 이후, 통도사에서 1801년 「추파 대명 진영(秋坡大明眞影)」, 「응암 희유 진영(凝庵僖愈眞影)」, 「일봉 우민 진영(日逢遇昊眞影)」, 「경하 경심 진영(慶坡敬審眞影)」을 제작하였다. 옥인은 「환성 지안 진영」을 제외한 다른 진영들에는 공통된 본을 활용했다. 1801년경 옥인이 그린 「추파 대명 진영」, 「응암 희유 진영」, 「일봉 우민 진영」, 「경하 경심 진영」에서 옥인이 제작한 진영 화풍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우선 인물의 자세와 배경을 이단으로 구분한 것은 보편적인 경향이지만, 인물의 오른편에 빠짐없이 경상과 경책을 두는 것이 특징적이다. 승려가 입고 있는 옷의 형태는 고름이 있는 장삼과 끈이 여러 개 부착된 가사를 입고 있는 점에서 같지만, 장삼의 고름, 허리띠 매듭, 세 개의 영자 고름을 가슴 앞에 그린 점이 다른 진영과 다르다.

그리고 옥인은 색채의 대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짙은 남색 장삼과 선홍색 가사의 대조, 그리고 선홍색 가사의 가장자리에 금색의 수가 놓인 남색 금란가사의 배치, 양쪽 손목에서 내려오는 장삼의 긴 소매에 보이는 미색 계열의 안감과 남색 계열의 겉감, 운문이 가득 그려진 녹색 계열의 배경과 그 위에 드리워진 선홍색 풍대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마지막으로 얼굴 묘사에서도 공통적 표현이 보인다. 즉 위로 향한 직선의 눈썹,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 단정하게 보이는 입매, 부드러운 미색의 피부 표현에 발그레한 홍조의 가미가 그것이다.

19세기 중반인 1843년 진영당을 중창한 이후 많은 진영들이 중수되거나 혹은 새로 제작되었다. 이 때 활약한 화사는 경상도 북부의 대승사에서 활약하던 자우이다. 자우는 대승사에 주석하며 진영을 많이 그린 퇴운(退雲) 신겸(信謙)의 손제자이다. 통도사에서 진영당을 중창하고 다른 지역의 화사를 초빙해 온 것이다. 자우는 이 시기 통도사에 주석한 화악 지탁(華嶽知濯)과 화담 경화(華潭敬和)와 가까운 법맥 관계에 있었으므로 이들을 통해서 통도사에 진출한 것으로 생각된다.

1859년에 제작된 「호암 체정 진영(虎岩體淨眞影)」, 「청담 준일 진영(淸潭遵一眞影)」, 「성곡 신민 진영(聖谷愼旻眞影)」은 화기에서 자우의 이름이 확인된다. 이 밖에 1854년 「성담 의전 진영(聖譚倚琠眞影)」, 1859년에 제작된 「화봉 유철 진영(華峯有喆眞影)」, 「성월 홍진 진영(性月弘震眞影)」, 「대은 우관 진영(大隱祐管眞影)」 등도 양식적인 측면에서 자우가 제작한 진영으로 추정된다.

자우가 제작한 진영의 공통적 특징은 인물의 두상이 크고 장삼과 가사가 풍성하게 표현된 점이다. 장삼의 긴 소매에서 물결치는 옷주름이나 가사를 여미는 색색의 고름 매듭에서 자우 고유의 표현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다리가 없는 평좌식 의자와 책, 병풍 등 다양한 기물이 자주 표현되는 것도 자우가 그린 진영의 특징이다.

이렇게 진영을 대량으로 주문 받은 옥인, 자우 같은 화사들은 자신이 고안한 초본에 의거하여 자세, 복식은 동일하게 그리면서 얼굴만 바꾸어 그리는 방식으로 진영을 그렸다. 진영에서 화사 개인의 특징은 인물의 골상을 그리는 것에서도 나타나지만, 특히 계속 반복되는 의습과 배경 표현 등에서 더 잘 드러난다.

의의와 평가

통도사는 진영당 건립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을 뿐 아니라 경상도의 거찰로서 대규모의 진영이 현존하고 있어, 승려 진영을 봉안하는 관습과 화풍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

참고문헌

『한국의 사찰문화재 일제조사』경남(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1)
『통도사가람배치실측조사보고서』(울산대학교 건축대학, 예문사, 2007)
『한국의 초상화』(조선미, 열화당, 1983)
『통도사지』(한국학문헌연구소 편, 아세아문화사, 1977)
「조선후기 승려 진영 연구」(이도영,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조선왕조시대 후기 불교진영」(정우택, 『다시 보는 우리 초상의 세계: 조선시대 초상화 학술논문집』,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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