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수묵. 각 폭 세로 135.8㎝, 가로 22㎝. 고종의 생부인 이하응은 조선 말기 역사적 전환기에 집권했던 정치가이다. 동시에 그는 일생 묵란화 제작에 몰두하여 독창적인 묵란화의 세계를 구축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30대 초반 무렵 추사 김정희로부터 묵란화를 배운 이후, 다양한 화법을 모색한 결과 1891년(72세) 회혼 기념으로 제작한 「묵란도」12폭 병풍에서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다. 이 병풍은 ‘난’이라는 식물이 지니는 정신성과 표현적 아름다움이 동시에 구현된 이상적 묵란화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 「묵란도」12폭 병풍은 두 폭씩 짝을 이루는 대련(對聯) 형식으로 되어 있어, 전체는 6벌의 각기 다른 대련의 조합이라 할 수 있다. 구도는 두 폭의 양쪽 가장자리에서 돌출한 바위를 중심으로 그 아래 · 위에 난을 배치한 석란화(石蘭畵) 형식이다. 이 석란화 형식은 이하응이 1875년(56세) 직곡산방에 은거할 때 처음으로 시도한 것으로, 말년까지 지속된 그의 대표적인 구도법이다.
이 「묵란도」12폭 병풍은 변화 있는 필선과 윤묵(潤墨)을 사용하여 괴석의 형태 묘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점이 돋보인다. 다양한 괴석의 표현 가운데 제 3, 4폭에 묘사된 한 쌍의 음양괴석도(陰陽怪石圖)는 조선 말기 괴석도로 유명한 정학교(丁學敎)의 작품과 관련이 있다. 위는 기괴스러우면서도 크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가늘어지는 입석(立石)의 묘사는 정학교 화풍과 흡사하다.
묵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난엽의 처리인데, 이 병풍에 보이는 속도감 있는 길고 예리한 곡선으로 시원스럽게 처리된 난엽은 운필의 기량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난의 포기 구성은 괴석의 비중이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간결하게 처리되었다. 난엽 한 줄기와 꽃대 하나로 한 포기를 이루는 절묘한 구성도 보인다.
이하응의 묵란화 가운데 표현력이 뛰어나고 실험 정신이 살아있는 작품들은 ‘병풍(屛風)’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 「묵란도」병풍의 화제에서 병풍에 대한 이하응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화제를 살펴보면, 병풍의 형식과 내용 및 용도에 대해 자세히 적으면서 점차 큰 병풍만을 선호하게 된 당시 풍속의 폐단을 지적했다. 이로써 병풍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을 짐작할 수 있다.
12폭 병풍의 각 폭에는 다양한 내용의 문장이 새겨진 사구인(詞句印)이 찍혀 있다. 동양 미술사상 묵란화를 병풍이라는 큰 화면에 제작한 것도 이하응이 처음이고, 각 폭 마다 다른 사구인을 찍는 방식 또한 이하응이 처음 시도한 것이라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생존 당시부터 ‘석파란(石坡蘭)’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했던 이하응의 묵란화는 구도와 필묵법에서 독특한 화풍을 개척하여 한국식 묵란화풍의 한 전형을 수립했다. 특히 시서화일치의 이념과 난과 괴석의 묘사가 조화를 이루는 이 「묵란도」12폭 병풍은 조선 말기 묵란화의 발달과 유행에 원동력이 된 것은 물론, 동양 묵란화사에서 최고의 예술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