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 동양인 최초로 미국 메리놀 수녀회에 입회한 천주교인. 수녀.
생애 및 활동사항
1925년 10월 김교임 수녀를 비롯한 다른 5인의 수녀들과 함께 귀국하여 평안북도 의주 본당에서 선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어린이들과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메리놀회 수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통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31년 메리놀 수녀회에서는 한국에 새로 수녀원을 창립하면서 그를 새로운 수녀원의 교육 담당자로 선발하였는데, 이를 위해 일본 동경 성심학원에 유학하여 일본 문학을 전공하고 1935년 귀국하였다.
1932년 6월 27일 평양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설립되었는데, 1935년 귀국하여 이 수녀회의 지도 수녀가 되었다. 1938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게 되고 그해 7월 3일 초대 수련장이 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적국인 미국인들이었던 메리놀 외방 전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일시적으로 감금되었다. 이에 같은 달 13일 평양교구장인 오세아(O'Shea) 주교는 그를 영원한 도움의 수녀회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메리놀회 수녀들이 모두 철수하여 어렵게 생활하는 중에도 회지 『마음을 드높이』(Sursum Corda)를 창간하여 수녀들의 교양과 양식을 넓히는데 힘썼다.
1945년 해방 후 북한 지역에서의 종교 탄압이 본격화되면서 많은 신부와 수녀들이 체포되고 종교단체들도 폐쇄되었다. 이 과정 중에 북한이 수녀원 건물을 양도하라고 명령함에 따라 1950년 5월 14일 수녀원을 해산하고 선교리 친척 집으로 갔다. 5월 23일 장기려(張起呂) 박사의 주선으로 인민종합병원에 입원하였지만 6월 16일 장기려 박사가 군의관으로 차출되자 퇴원하였다. 6월 19일 진남포 본당 조문국 주임 신부의 배려로 진남포에 머물렀지만, 6월 24일 조문국 신부가 납치되자 다시 평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7월 6일 강성효, 변대옥 수녀들과 함께 용궁리 회장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7월 24일 영유본당 관할의 송림리 공소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10월 4일 저녁 인민군 장교 2명과 사복 차림의 또 한 사람에 의해 연행된 뒤 행방불명되었다.
참고문헌
- 『북녘 땅의 순교자들』(평양교구 순교자 사료 수집위원회, 가톨릭출판사, 1999)
- 『천주교 평양교구사』(천주교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분도출판사, 1981)
- 「한국 교회의 인물상(31), 장정온(張貞溫, 앙네다) 수녀」(윤선자, 『교회와 역사』203,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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