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은 우리 고전 시가 작품에 대하여 ‘음란하다(淫哇), 방탕 교만하다(矜豪放蕩), 세상에 대해 공손하지 않다(玩世不恭)’ 등의 평가를 내리면서 그와 상대되는 용어로 ‘온유돈후’를 제시하였다. 최진원은 고려 시가가 ‘주(酒)·가(歌)·무(舞)의 관능적(官能的) 향락(享樂)’이 주된 내용이라고 정리하면서 “이 관능적 향락은 도학자 퇴계에게는 성정을 흐리게 하는 못마땅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온유돈후(溫柔敦厚)는 이와는 대조되는, 진실하고도 맑은 소리로 선(善)을 이끌어 내고 비루함을 씻어버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온유돈후는 퇴계 이황이 자신이 지은 국문 시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이 지향하는 작품 세계를 드러내는 말로 사용했다. 그 유래는 『예기(禮記)』 「경해(經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그 나라에 들어가면 교화의 정도를 알 수 있다. 그 사람들이 온유돈후하면 시의 교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주희는 성품이 부드럽고 따스하며 안색이 온화하다는 말이라고 주를 달았다. 이것이 바로 시의 효용이어야 한다고 이황이 말한 것이다. 17세기 초반의 문신 장경세(張經世)는 그 내용을 ‘의사(意思)의 진실, 음조(音調)의 청절(淸絶), 선단(善端)의 흥기(興起), 사예(邪穢)의 탕척(蕩滌)’ 등으로 보았다.
이황은 우리 고전 시가 작품에 대하여 ‘음란하다(淫哇), 방탕 교만하다(矜豪放蕩), 세상에 대해 공손하지 않다(玩世不恭)’ 등의 평가를 내리면서 그와 상대되는 용어로 ‘온유돈후’를 제시하였다. 즉 진실하고도 맑은 소리로 선(善)을 이끌어내고 비루함을 씻어버리는 것이 온유돈후라고 보았다.
「도산십이곡」에 보이는, 세계의 질서와 조화, 그 원두처로서의 이(理), 조화인 도덕은 서로 깊이 관계되어 있다. 그것은 자연과 세계의 질서, 조화를 인간의 도덕으로 보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자연의 조화와 동치인 인간의 도덕 또한 조화의 원리에 의해 파악된다.
「언지(言志)」4(유란幽蘭이 재곡在谷하니 자연自然이 듣디됴해)와 「언지」 6(춘풍春風에 화만산花滿山하고 추야秋夜애 월만대月滿臺라) 의 작품을 통해 이해해보자. 골짜기의 유란과 산 위의 백운은 그 있을 곳에 있음으로 인해 듣기 좋고 보기 좋다. 이것은 세계가 제자리에 놓인 질서와 조화를 아름답다고 파악하는 화자의 판단을 전해준다. 그러한 세계 질서의 근원적 원리는 미인(美人)으로 표현되었다. 자연의 현상이 아름다운 것은 그 근원적 원리의 아름다움에 기인한다. 이치(理)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은 현상적 질서의 근원적 질서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모습은 있어야 할 그 모습이 현현된 것이므로 아름답다. 그것은 자연뿐 아니라 사람까지 포함한다. 그것은 「언지」 5에서 보였듯이, 청산과 유수의 질서가 ‘우리도’로 확장되는 것과도 같은 구도이다.
「언지」 6의 사시(四時)의 질서가 가흥(佳興)이면서 동시에 ‘사람과 한 가지’라고 파악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시의 질서는 난초(幽蘭), 흰구름(白雲), 청산(靑山), 유수(流水)보다 더 자연의 질서를 잘 드러낸다. 그것은 움직이고 변화하면서도 제 위치를 잃지 않는 자연의 질서를 더 잘 설명한다. 그 질서는 ‘화만산(花滿山) 월만대(月滿臺)’와 같이 실질적 내용을 가지면서도 실체화되지 않는 변화의 축으로서의 태극의 모습을 제대로 전달하기 적절하다. 그것은 아름다운 흥이다.
사람도 그 흥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시의 자연과 사람의 만남에서 가흥을 느낀다. 그것은 자연의 근원적 조화와 충만한 실질과, 역시 자연의 태극을 나누어 갖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 근원적 심성이 조화롭게 일치됨을 확인하는 데서 오는 흥이기에 아름답다.
구체적 자연물을 통해서 세계의 근원적 조화를 만난다는 심미적 경험이 바로 「도산십이곡」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경험은 우리 의식 속에 들어와 세상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삶의 틀을 형성해 나가는 자양분이 된다. 그 결과물이 세계를 사는 포괄적 행동규범의 근거를 제공해줄 수도 있다. 세계를 깊이 이해할 때 원망이나 자랑, 음란함 등은 사라지고 세계와 통합되는 자아의 따듯한 시선, 온화한 얼굴이 남는다. 이것이 온유돈후이다. 이러한 시가 미학은 현재에도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다. 현대시와의 접맥을 통해 한국적 시가 미학을 세우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늘 세상과 부딪친다. 세상이 늘 합리적이거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어서 사람들은 때로는 불공평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에 대하여 자만심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세상을 비판 또는 비관하거나 스스로 오만해지거나 과도한 슬픔 또는 기쁨에 빠지기 쉽다. 온유돈후는 어떤 경우에도 따스하고 부드럽게 도타운 정으로 세상을 대하라고 주문한다. 이것이 시 또는 예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이황은 말한다. 시 또는 예술은 그 경지를 드러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황은 「도산십이곡」을 통해 그렇게 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