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과 함께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으며, 접시를 받치는 경우도 있다. 공헌 등의 의례에 사용되는 도구로 불교가 유입되는 삼국시대 이후 등장한다. 처음에는 불교 의례에 사용되다가 점차 개인용 식기로 수용된다. 동완을 만드는 방법은 우선 거푸집을 이용하여 대략적인 형태를 주조하고, 그 뒤 열을 가해 온도 처리를 더하여 경도를 높인다. 그것을 녹로에 고정한 후, 회전력을 이용하여 끌과 같은 도구로 기벽을 얇게 깎아 내어 완성한다. 이러한 제작기법은 이전의 주조 후 표면을 마연하여 광택을 내는 제작기법에서 진일보한 것이다.
한반도의 동완은 중국을 통해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도 육조대 서역으로부터 회전을 이용하여 내면을 깎는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어 동완이 제작되기 시작한다. 물론 그 계기는 불교의 수용과도 관련된다. 즉 부처에 공헌하는 의기로서 최고의 기술로 서역에서 제작되던 동완이 불교와 함께 중국으로 전래된 것이다.
중국 내에서는 단순히 불교에서의 의례용구에 멈추지 않고 왕조의 궁정에서 행해지던 의례, 그리고 황제나 귀족의 식기로 채용된다. 즉 식기의 ‘계층분화’와 연관되어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한반도나 이웃한 일본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일본의 경우도 동완의 부장이 증가하는 시기는 불교문화의 성행과 결부된다. 동일본에 편재하고 있는 점에서 야마토 정권이 지방호족에게 사여한 것이며, 실용적이면서 호화로운 식기로 귀족들의 생활에 사용되었다고 본다.
한반도의 경우 고구려의 집안 칠성산 96호분에서 십자형의 손잡이가 달린 동완이 최초로 확인된다. 이 형태는 경주 황남대총 남분, 서봉총 등 신라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양자의 영향관계를 알 수 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완은 525년(왕)과 529년(왕비)이라는 매장연대를 알 수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왕비의 관 부근에서 출토된 탁잔은 중국 광동성 수녕현 변만촌 남조 교장 유적 등지에서 유사한 것이 확인되어 중국에서 제작되어 백제로 유입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 나주 복암리 1호분, 군산 산월리 6호분, 서천 옥북리 1호분, 여수 두락산성, 부여 관북리 등지에서도 동완이 출토되었다. 가야에서도 동완이 확인된다. 대구 달서 55호분, 합천 옥전 M3호분, 창녕 교동 7・11호분, 진주 수정봉 2・옥봉 7호분 등지에서 출토되었는데, 신라와 백제를 통해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는 경주 월성로 가-13호분에서 최초로 금제완이 확인된 이후, 황남대총, 천마총 등 왕릉급 무덤에서는 고구려와 유사한 동완이 출토된다. 이외에도 황룡사 9층 목탑지, 안압지 등지에서 다량의 동완이 확인되며, 특히 동천동 등지에서는 동완을 만드는 토제 거푸집이 출토되고 있어 주목된다.
동완의 등장은 국가형성기 개인용 식기의 등장에서, 식기의 계층분화로 국가의 체재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령왕릉 등 연대를 알 수 있는 무덤 자료의 존재, 금속 용기를 모방하여 제작된 토기, 도기와의 비교를 통해 중국·한국·일본 광역의 고고학 편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귀중한 자료로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