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법흥리고분군은 자유로 건설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유적이 위치한 곳은 토사를 채취하기 위한 토취장일 뿐만 아니라 이전에 도굴이 되어 유적 대부분이 훼손된 상태였다. 발굴조사는 1992~ 1993년에 걸쳐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와 호암미술관에서 연합으로 실시하였다.
이곳은 속칭 ‘큰말’이라고 부르는 지역과 ‘월음실’이라고 부르는 지역 사이로 자유로 성동리 인터체인지에서 동쪽으로 약 500m 가량 떨어진 곳이다. 고분군은 해발 99m의 능선이 북쪽으로 낮아지면서 연결되는 야산지의 남향한 경사와 북쪽 능선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
호암미술관이 담당한 A지구에서 확인된 석실분은 모두 5기이며 석곽은 모두 남쪽으로 향하는 주 능선상의 동사면을 택하여 입지한다. 유구의 규모와 형태는 대체로 횡구식이며 횡혈식 석실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도 1기가 있다. 현재 잔존 석벽의 높이까지는 대체로 면이 반듯하고 편평한 큰 할석들을 세로면으로 쌓아 올렸으며 입구 쪽인 남단벽을 제외한 양측벽과 북단벽은 서로 엇물리게 하였다. 시상은 출입구와 나란히 판석상의 할석 3매를 같은 간격으로 깔고 서편의 공간은 비워 두었다. 호석은 산등성이 쪽을 제외한 경사면에는 다소 불규칙스럽고 연결이 뚜렷하지 않으나 석곽을 중심으로 거의 원형으로 돌리고 있다. 부장품은 유구가 도굴되어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으나 1호 고분의 바닥에서 과대금구 일부가 출토되었으며 그 외에는 대부분 연질토기, 인화문토기 등이다.
한양대에서 발굴한 B지구에서 확인된 석곽분은 3기이며,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석곽분은 바닥 일부 혹은 한쪽 벽만이 남아 있고, 나머지 부분은 파괴되어 정확한 축조방식을 파악하기 어렵다. 석곽분에 사용된 석재는 대부분 다듬어진 화강암이 사용되었으며, 석곽의 규모에 따라 석재의 크기도 조금씩 다르다. 1호와 3호는 벽석의 크기가 길이 3040㎝ 내외이며, 2호 벽석의 크기는 길이 4060㎝, 너비 4055㎝, 두께 2040㎝ 내외이다. 이 유적의 석곽분은 대체로 시기 폭의 편차가 거의 없이 조영되었다고 생각된다. 고분군은 삼국시대 말까지의 고분들이 대체로 밀집군을 형성하는데 반해 상당한 거리를 두고 분산되어 있어 통일기 이후 분묘조성의 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토광묘는 법흥리 유적의 동남단으로 뻗어 내린 완만한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다. 토광묘의 축조 방식은 적갈색 점토충과 풍화암반을 판 다음 목관을 넣고 그 위에 부장유물을 집어넣거나 혹은 목관 내에 유물을 넣은 다음 봉분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부장유물은 족부, 두부, 좌우벽단 등 놓이는 위치의 구분에서 일관성이 없지만 용기류와 수저는 함께 두었다. 출토되는 유물의 종류로는 호, 분청, 백자, 청동발 등의 용기류와 청동숟가락, 철겸, 철협, 동전 등이 있다. 토광묘가 조영된 시기는 도자기로 살펴볼 때 15세기 초~17세기 초까지 대략 200여 년간에 걸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