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제간 ()

고대사
물품
성벽을 오르기 위한 삼국시대의 공성무기.
정의
성벽을 오르기 위한 삼국시대의 공성무기.
연원 및 변천

중국의 경우 당송시기를 거치면서 공성무기(攻城武器)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의 상쟁이 격화되면서 방어성들이 늘어났고 공성전의 비중도 높아졌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중국의 공성무기가 도입되고 새롭게 개발되었으며, 충제간(衝梯竿)도 이 무렵에 등장한 것으로 파악된다.

구조 및 형태

충제간은 명칭에서 보듯이 공성용 사다리를 의미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수레에 장착한 공성용 사다리는 운제(雲梯)라 하고, 수레없이 사다리 자체만을 말할 때는 주로 비제(飛梯)라 부른다. 신라의 운제당(雲梯幢)에서 제작한 것은 명칭에서 볼 때 수레가 달린 대형의 공성용 사다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당시 수나라가 사용한 충제간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613년 수 양제(煬帝)가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 때 심광(沈光)이 15장(丈)이나 되는 충제간의 끝에 올라가 고구려 병사와 싸웠다고 한다. 심광은 고구려 병사에 의해 땅에 떨어지게 되자 충제간에 드리워진 줄을 잡고 다시 올라가 싸웠다.

『동국통감』에 나타나는 충제간은 병사 한 명이 그 끝에 올라가 홀로 싸운 점으로 보아 대형의 운제가 아니라 비제로 여겨진다. 이 충제간의 위쪽 끝부분 양쪽에 밧줄을 매어 늘어뜨려놓는데, 공격하는 병사들이 이 밧줄을 붙잡아 방어하는 병사들이 사다리를 뒤로 밀어 넘어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제조 방법

신라에는 사설당(四設幢)이 설치되었는데, 노당(弩幢)·운제당(雲梯幢)·충당(衝幢)·석투당(石投幢)이 그것이다. 사설당의 명칭에 ‘설(設)’이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는 점에서 이들은 공성무기를 제작하고 보급하는 부대로 인식되고 있다. 이 가운데 운제당은 공성용 사다리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던 부대로 추정된다. 이 곳에서 충제간도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사용 방법 및 특징

충제간이 충차(衝車)에 연결된 공성용 사다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국통감』에 충제간과 함께 나타나는 비루(飛樓)·당차(撞車)·운제(雲梯)·지도(地道) 등이 대형의 공성무기인 점과 충제간의 ‘간(竿)’이 강조된 점을 통해 볼 때, 비제(飛梯)의 한 종류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중국 송나라 시기의 비제는 그 길이가 23장(丈)인 것도 확인되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통감(東國通鑑)』
『中國古代 軍事工程技術史』 (王兆春, 山西敎育出版社, 2007)
『中國古代兵器圖冊』 (劉旭, 書目文獻出版社, 1986)
「『삼국사기』를 통해 본 6~7세기 신라의 무기 체계」 (송영대, 『사학연구』 117, 2015)
집필자
이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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