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대난지도와 소난지도를 의병의 거점으로 이용하면서 일본경찰대와 수비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등 해상을 이용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면천 매염리 출신으로 군부에 근무하던 최구현(崔九鉉: 1866~1906)은 벼슬을 버리고 1906년 4월 당진 기지시에서 창의하였다. 최구현은 면천·당진·고덕 등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37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5월 면천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자 소난지도로 들어갔다. 그러다 8월 일본 경찰대와 격전 중 체포되었으며, 면천 감옥에서 재산을 빼앗기고 풀려났으나 수감 중의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이후 당진의병은 정주원(鄭周源: 1870~1925) 의병 부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당진 고대면 출신인 정주원은 1907년 8월 경기도 용인에서 창의하여 경기도 지역과 당진을 오가면서 활약하였다. 당진과 면천의 관아를 공격하고, 당진 읍내를 점령하였다. 또 한인 경찰을 체포하고, 경찰관서에 있던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하였을 뿐 아니라 빼앗은 경찰복을 입고 활동하며 교란 작전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주원은 1908년 7월 당진에서 체포되어 9월에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정주원 부대는 괴멸되고 많은 의병들이 체포되었으나 일부 부대원들은 1910년까지도 활동을 계속하였다.
한편 홍원식(洪元植)이 지휘하는 소난지도 의병은 면천성을 공격하여 전과를 올리는 등 활발히 투쟁하였다. 그러나 소난지도 의병은 1908년 3월 일본 경찰대의 공격을 받고 소난지도의 해안 끝까지 밀리면서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1백여 명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는 희생을 치렀다.
당진의병은 1906년부터 1910년까지 당진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의병 활동을 전개한 특징이 있다. 초기에는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당진·서산 지역과 경기 지역을 선박으로 이동하면서 활동하는 수적(水賊)의 활동과 함께 일어났다. 수적을 의병에 영입함으로써 의병의 전투력을 제고하였으며, 의병의 한계로 지목되던 신분간의 차이로 인한 문제를 극복하였음을 볼 수 있다. 또 당진의병은 당진 출신만이 아닌 경기 지방 출신의 의병들까지 서로 연합하여 활동한 점 역시 주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