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지도는 활빈당의 일종인 수적(水賊)의 근거지 중 한 곳이었다. 1905년 이후 의병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수적이 의병화하면서 소난지도는 의병의 근거지로 탈바꿈하였다. 의병들은 소난지도를 중심으로 배를 이용하여 경기도 수원 일대와 충남 당진 일대를 오가며 활동하였다. 홍원식(洪元植)[일명 홍일초(洪一初)]은 경기도 수원의 양반 출신으로 관력은 없다.
1908년 들어 당진 일대에 의병 활동이 극렬했다. 3월 9일에는 의병들이 당진 읍내에 들어와 박사원을 붙잡아 주민들 앞에서 밀정이라 하여 총살시킨 일이 있었다. 홍성경찰분서는 이 보고를 받고 3월 13일 일본인 순사 7명과 한인 순사 8명 등 15명으로 구성된 경찰대를 편성해 아가츠마 다카하치(上妻孝八)의 인솔하에 당진 지역으로 파견하였다.
소난지도가 의병의 근거지임을 확인한 일본 경찰대는 1908년 3월 15일 오전 6시경 탈취한 어선을 몰고 소난지도 앞의 우무도에서 소난지도 상륙을 시도하였다. 의병은 경찰대를 향해 1시간여 사격을 가하여 한인 순사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러나 우세한 화력으로 공격해 오는 경찰대의 상륙을 막을 수 없었다. 무려 9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탄약이 떨어진 의병대는 동쪽의 해안 끝까지 밀렸으며 그곳에서 36명의 희생자를 냈다. 섬의 북쪽에 있는 동굴 속에 있던 의병 5명도 살해되었다. 바다에 빠지는 등 행방불명된 의병도 50명에 달한다.
소난지도에서 일본 경찰대의 의병에 대한 공격은 잔인하였다. 심지어는 선원과 부상당한 의병까지 살육하는 학살 행위를 했다. 소난지도 의병의 피해 소식은 곧장 수원에 있는 의병부대에 전달되었다. 3월 19일 저녁 9시 수원 지역 의병이 10척이나 되는 배를 타고 당진군 내맹면 고항포(현 석문면 장고항)에 들어와 밀고자 색출을 꾀하기도 하였다.
소난지도 의병 항쟁 소식은 서울에까지 전해져 『황성신문』에도 보도가 될 만큼 큰 사건이었다. 이 사건 뒤 홍원식은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한 후 1910년대에 학교를 설립해 교육 사업을 하였다. 또 구국동지회를 조직해 항일 활동을 하였으며, 고향에서 3·1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4월 15일 제암리교회에서 부인과 함께 순사한 것으로 추정된다.